'촛불시위'에 해당되는 글 6건
- 2008/07/08 촛불을 드는 것, 혹은 관찰하기 (2)
- 2008/06/29 과격 폭력 진압 관련 대정부 단독담화문
- 2008/06/17 2MB 요정설에 대한 신뢰도 대폭 증가 (2)
- 2008/06/12 "'분노의 촛불' 워싱턴포스트,뉴욕타임스 1면 톱 게재" (1)
- 2008/06/10 결전의 날
- 2008/06/08 '폭력시위' 에 대한 일련의 반응에 대한 단상 (6)
현재 촛불 정국에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성을 외치며 촛불에 대해 온갖 논평을 쏟아내는 지식인들과 상당수의 시민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현대 사회에서 관찰자와 행위자를 엄격하게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객관적인 관찰자에 한정 지으려는 이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회인이라면 무릇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유무형의 사회적 책임이 따르는 만큼 그들이 행동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잃을 것은 시간이요 얻을 것은 사명감뿐인 학생이 이미 가족과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인들에게 정의를 위해 소유를 내려놓으라며 윽박을 지르는 것은 설득력도 없을뿐더러 썩 보기 좋은 모양새도 아니다. 하워드 진의 말마따나 이는 성숙하지 못한 행위이며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행위도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 누가 아도르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문제는 '편향적' 인 행위자와 스스로 구분을 지으며 '객관적' 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목소리들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그 파급력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구세력의 신성동맹이 내는 반동적 목소리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후자가 우익 특유의 무지막지함과 정서과잉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진지하게 경청할 가치가 없는 코미디로 수용된다면 전자는 세련된 외양을 무기로 공론의 영역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은 목소리 자체로 현실을 재창조한다. 현재 촛불정국에 대한 여론은 집회에 직접 참여한 시민들의 열정적인 체험담 외에도 수많은 관찰자들의 목소리 또한 가미되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여론' 은 촛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행위를 하지 않는 관찰자들은 무엇을 관찰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이들이 촛불집회의 모든 순간에 현장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열성적인 참여자에게도 힘든 일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몇 번의 참여에 따른 단편적인 인상 혹은 언론 보도 내용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현장의 최전방에 있던 자만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맥락을 스스로 재구성 해보는 정도의 책임감은 가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책임감 없이 단편적 이미지에 휩쓸려 아우성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특히 반동적 언론에서 주어진 이미지에 휩쓸리는 목소리들은 가장 위험하다. 이들 언론의 보도만 보자면 현재의 촛불 정국은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귀족들을 학살하는 혁명의 상황에 가깝다. 전경을 집단 구타하고 인민재판을 하는 혁명적 상황에 대한 목소리는 혁명에 열광하는 목소리와 혁명에 반대하는 그것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란 대부분의 관찰자들은(행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유혈 혁명에는 생래적 거부감을 지니고 있기에 촛불 정국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것이 반동적 언론들의 전략이자 '객관적' 관찰자들의 한계이다. 이들의 폭력비판은 공허하다.
근본주의적 폭력비판은 실질적으로 소용이 없다. 기껏해야 전경과 시민 모두 잘못하였다는 무의미한 양비론으로 빠지거나 '누가 먼저 때렸나' 라는 검증 불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검증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폭력적' 이고 '비이성적' 인 행위자들과 자신들을 대비시키며 '비폭력' 과 '이성' 의 영역에서 훈수를 둔다. 반동적 목소리들은 훈수의 재료를 제공한 뒤 터져 나오는 관찰자들의 세련된 훈수 뒤에 자신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을 숨긴다. 그리고 훈수가 행위자들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잠재웠을 때, 이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은 비수가 되어 관찰자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행위자들을 찌른다. '일반시민' 들인 관찰자의 이름으로.
여기에 관찰자들의 비극이 있다. 이들은 순수하다. 시민에 대한 전경의 폭력과 전경에 대한 시민의 폭력 양쪽 모두에 분노하며 노무현의 악덕만큼이나 2MB의 악덕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노무현 정부 시절이나 2MB 정권 시절이나 '운동권' 들에 대한 강경진압에 무감각한 것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사진예술이 태동하던 시기를 살았던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이미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듯, 맥락이 거세된 단편적 이미지는 이들의 순수함을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만들며 농락한다. 벤야민은 비판정신을 마비시키는 사진의 순간적 이미지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표제를 제시하였지만 이미 반동적 언론들은 자신들만의 맥락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였고 그 세계 안에서 자유자제로 표제를 붙여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의 세계 안에서, 이들의 표제는 사진의 '진실' 을 가장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사와 사진 이미지들로 구성된 반동적 언론의 매트릭스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순수한 렌즈로 관찰을 하기가 힘들게 된다. 직접 촛불 집회에 나오더라도 그것은 어수선한 집단 객기쯤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그 시각은 더 이상 '객관적' 이지 않다. 아마 전쟁터에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진영논리가 작용하는 현실 정치 영역의 권력 게임에서 객관적인 관찰자는 존재하기 힘들다. 행위자 혹은 자원만이 있을 뿐이다. 직접 거리에 나서는 것만이 행위는 아니다. '과격 행위자' 와 '부정적 시선으로 관망하는 시민' 의 형태로 가공되어 나타나는, 행위자와 관찰자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적 인식을 깨뜨리고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신중하고 올바른 관찰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사회참여 행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관찰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변혁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관찰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며 또 다른 길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이에 반해 순간적 이미지에 휩쓸려 감정적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객관적 관찰' 과는 거리가 멀며 어떠한 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행위자들과 애초에 선을 긋고 무책임한 논평, 아니 감정의 배설을 쏟아내는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자기성취적 예언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촛불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신중을 기해 말한 방향제시와도 전혀 성격이 다르다.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허공을 맴돈다면 관찰자들의 목소리는 관찰자 그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유통이 되며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리고 반동적 언론은 그들의 목소리를 시민 대다수의 의견으로 포장하며 또 다시 관찰자들은 그러한 보도에서 '판세' 를 읽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그에 맞춘다.
거리에 나올 용기와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고 판단할 책임감 중 어느쪽도 갖추지 않은 채 '쿨' 한 척만을 하는 관찰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만들어질 미래는 역시 차가운 미래일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현재의 촛불 정국은 확실히 87년 6월과는 다르다. 하지만 87년 대선과 같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자를 택일해야 하는 양자역학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변화 역시 순수한 선과 변혁을 동시에 취할 수는 없다. 그리고 2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보았을 때 '관찰자' 들의 상당수는 최소한 순수한 선을 택할 완고한 도덕주의자들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코를 틀어막고 2MB에게 투표를 하였다면 변혁을 위해 촛불의 몇 가지 소소한 악덕쯤은 감수하고 다시 한 번 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도 '나는 찍지 않았습니다' 를 무기력하게 외칠 것인가.
프레시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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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원본 대국민 '협박문' 부터 감상을 하자.
http://www.frontiertimes.co.kr/news_view.html?s=FR01&no=28791&s_id=9&ss_id=0
자작 대정부 단독담화문
존경이 되지 않는 2MB 일당들!
어제 저녁, 또 다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과격 폭력 진압이 벌어져 시민과 경찰 양쪽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부 전경이 곤봉과 방패로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빈 소화기통과 보도블럭까지 시민들에게 던져댔다. 나아가 쓰러진 여성을 발로 마구 밟는 일까지 발생했다. 참으로 걱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데 대해 깊은 분노의 뜻을 표하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끌려나와 부상을 당한 전의경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시민들은 그 동안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재협상을 주장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한때 2MB는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경청하는 척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의 태도 역시 2MB의 사과문과는 상당히 달라지고 있다. 쇠고기 문제 뿐만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정책들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강행하려 하고 있다. 경찰의 진압 양상도 날이 갈수록 과격 폭력화 되고 있다.
또한 한나라당은 오늘 일요일, 개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성명을 발표하고,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가기 위한 후안무치한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친애하고 싶지 않은 2MB 일당들!
그 동안 시민들은 정부에 대해 정부의 자정능력을 믿는다는 차원에서 평화적인 집회를 위해 노력하며 인내를 갖고 정권퇴진 운동을 최대한 자제해 왔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숙였던 정부가 고소영 강부자 주도의 MB노믹스의 강행, 80년대식 진압을 다시 꺼내들면서 급기야 어젯밤과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가 재발한다면, 시위에 참여한 일반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는 절대로 막아야 한다. 시민들로서는 불법 폭력 과격 진압에 의한 불행한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소화전을 이용하는 등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과격 폭력진압을 조장 선동하거나 극력 폭력행위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기록, 추적해 국민의 심판을 내릴 방침이다. 파괴된 방송장비 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민사상의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 아울러, 한나라당의 망발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2MB 일당들!
이번 시위와 관련해 전의경들의 부모이자 친구인 시민들이 밤낮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젯밤에도 수백명이 넘는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고, 이 중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다.
지금까지 부상당한 시민들은 총 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10개가 넘는 농성천막과 140여 점의 농성장비도 파손됐다.
2MB의 집권이 네 달이나 계속되면서 자영업은 물론 우리 경제 전체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국가신인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외국 투자자와 관광객들도 발길을 돌리고 있다.
전 세계가 유가급등으로 위기에 몰려있고, 특히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에서 2MB가 대통령으로 있을 경우 누가 우리나라에 믿고 투자하겠습니까?
2MB의 집권은 서민경제를 죽이는 일이고, 그 피해는 묵묵하게 일하고 있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더구나 이런 현실은 아직까지도 시민들께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균형있는 보도가 필요하다. 정확한 정보들이 시민들께 전달될 수 있도록 조중동의 회개를 당부드린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시민들의 고충에도 관심을 갖고 보도해 주실 것을 거듭 요청드린다.
또한 한나라당도 개념없는 성명서를 철회하고, 미 쇠고기 재협상을 즉각 당론으로 정하기 바란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민의를 대변하여야 할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친애하고 싶지 않은 2MB 일당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발전 시키는 데 역량을 모아나가야 할 때다.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가운데 정책을 수행하는 성숙한 국가 운영역량을 보여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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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B 요정설이란?
사실 예전에 쓴 글(2MB 탄핵에 대한 단상)에 나타나 있다시피 나는 5월 초만 하더라도 촛불문화제의 가능성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 대운하나 공공부분 민영화 등 한국의 중장기적 사회경제적 체제 자체를 뒤엎을 수 있는, 산적한 거대 이슈들을 놓아두고 그 확률도 매우 미미한 광우병 이슈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대중을 보며 어느정도는 냉소를 보내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선을 거쳐 4월달의 총선 패배를 겪고 나니-게다가 내가 선거운동을 뛰었던 후보 사무실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패배를 목도하였다- 한국의 대중에 대한 실망과 불신감이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는 말로 미약한 변명을 해본다.
여하튼, 내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촛불문화제에 모인 시민들은 나에게 멋지게 어퍼컷을 날렸고, 나는 5월 2일 이후로 꾸준히 촛불문화제와 가두행진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기말고사와 논문을 쓰느라 바뻐 촛불시위 출석이 뜸해진 요새 와서 생각해보건데 2MB 요정설은 통찰력이 있는 주장인 것 같다.
기억해보자. 촛불이 시들할때마다 여기에 불을 부은 것은 시민들의 열정과 아이디어 이전에 2MB 의 삽질이었다. 지속적으로 부어주는 배후설과 간간히 터뜨려주는 돌출 발언, 그리고 강경 진압은 그만큼의 강한 반발을 수반하였고 이 반발은 고스란히 촛불의 기름이 되었다.
촛불시위가 가두로 나올 수 있도록 계속 귀를 막은채 먹사들과 대화하던 2MB는 시위대가 가두로 나와 논란이 될 법한 시기에 25일 신촌의 진압 크리를 날려줌으로 가두시위에 대한 비난여론을 잠재우며 시위대의 상황판단능력 역시 대폭 증가시켜 주었다.
그리고 6월 1일, 피의 일요일은 2MB가 국민의 정치의식을 일깨우고 함양시키기 위한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깨달은, 절대정신의 각성 기념일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의 '지령' 이 떨어지자마자 아고라의 노빠들이 청와대 진격 무용설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최소한 그 전까지는 청와대 진격이라는 행위의 부적절성보다는 경찰의 폭력진압이 주요 이슈였다.
또한 촛불의 중요한 고비였던 6월 7일 저녁, 프락치 논란까지 있던 폭력사태에 대한 목소리가 일파만파 확산되기 시작하여 6월 10일 시위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해지던 시기에 2MB는 명박산성이라는 기상천외한 아이템으로 벼락치기 인력동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아마 명박산성을 보고 온 사람들이 최소한 몇만명은 될게다. 명박산성과 더불어 81년생 북파공작원이 존재하는 가짜 HID 는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는 데에 톡톡히 기여하였다.
결국 명박산성의 가호로 6월 10일 시위를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치루어내었지만 청와대의 리액션도 미적지근한 데다가 추후의 뚜렷한 목표가 정해지지 않아 지쳐가던 시민들. 하지만 역시 우리의 2MB 요정은 시민들이 지쳐가는 것을 눈뜨고 볼 수가 없어 LPG 가스통과 함께 고엽제 전우회를 여의도에 파견하사 시민들이 오랜만에 운동도 할 겸 운치있게 야경을 보며 한강을 걸어서 건너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곧 장마철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부터 비가 온다는데, 비가 내리기 전부터 2MB 요정은 역시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오늘은 길고 긴 장마철을 맞이하여 3종 세트이다. 오전에는 김종훈의 옥쇄 크리, 오후에는 이랜드 홈에버(신실한 박성수가 운영하는 그 이랜드 맞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지니....)의 쇠고기 원산지 위조 크리, 밤에는 촛불시위 생중계의 메카 아프리카 TV 대표 긴급구속 크리.
아마 내일 ASEM 회의때 세계 각국의 요인들에게 한국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오늘 하루에 몰아서 일들을 터뜨려 주었나 보다. 대책위 측에서는 2MB에게 20일까지 기한을 주었는데 과연 20일 당일날에는 또 무엇을 하사해 주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노무현 시절, 민주주의보다 경제성장을 택하였던 괘씸한 시민들에게 몸소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체험시켜주는 2MB 요정의 국가와 시민에 대한 배려와 사랑 앞에서 나와 같은 룸펜은 그저 조용히 그분의 희망에 따라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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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공고화 되었고 보편의 가치가 된 사회에 살고 있는-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서구인들의 눈으로 보자면 민주주의 혁명은 일종의 '로망' 에 가깝다. 얼마전 사학법 및 종교인 과세 논란이 벌어졌을 때 광신도들이 벌이던 '순교' 퍼포먼스와 같은 맥락선상에 닿아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개신교인들이 신화의 영역에 있는 사도들의 순교에서 뜨거움을 느꼈다면 '민주주의 신도'(비꼬는 의미는 아니다) 가 된 서구인들은 역시 신화가 되어버린,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뜨거움을 느낀다.
87년 6월 항쟁의 열정을 경험적 차원에서 되살리던 한국의 386세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서구인들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을 신화의 차원에서 소비한다. 그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구에서 그렇게 대접을 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라파예트와 제퍼슨을 방불케 하는 민주주의 혁명 신화의 살아있는 주인공이였던 것이다.
결국 서구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산업화' 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 과 '야생의 에너지' 를 읽어내듯, 아시아에서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민주주의 혁명' 의 신화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소비방법은 역설적으로 이들이 현재 국면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 시위를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둘러싼 단순한 '반미' 차원에서의 운동으로 보는 것이 아닌, 2MB 정부의 정책방향과 독선적 국정운영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로서 서술하고 있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배후설을 운운하는 조중동의 기사보다 훨씬 정확하다. '반정부'(조중동은 2MB 정부에 대한 반대와 정부라는 체제 일반에 대한 거부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악습이 있다) 혹은 '반미' 가 아니라 '민주' 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내면에 공고화되지 않은 국내 파시즘 언론들(우파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보다 해외 언론의 민주주의에 대한 로망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역설이 발생한다. 외신을 보는 것은 제 3자의 시각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그 장점이 있긴 하지만, 우리의 펜이 아닌 푸른 눈 속에서 우리의 실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뉴욕타임스에서 발췌-
For the past 40 days, central Seoul has been rocked by demonstrations , which began as rallies by hundreds of teenage students, singing, dancing and holding candles to protest the importing of American beef. They have now evolved into a protest against government policies on education, health care and consumer pr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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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의 날, 6월 10일이 밝았다. 3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나 학교에 있다가 시위에 참가할 계획인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제 최장집 교수가 인터뷰에서 말했다시피 이 정제되지 않은 열정을 제도화해주고 지속시켜 줄 정당이 부재한 현실에서 통제가 불가능한 에너지 덩어리가 어느쪽으로 흘러갈 것인가.
일요일의 '폭력시위' 때문에 여론악화를 걱정하였지만 친절하게도 전경은 14세 소년의 뒤통수를 방패로 가격하였고 2MB는 세종로에 컨테이너 공구리를 치고 있다. 5월 초에 간단하게 끝낼 수 있던 문제를 이렇게까지 비화시킨 2MB의 선동능력과 정치력은 이래저래 역사에 남을 듯 하다.
이 판국에서도 시민사회의 원로들-물론 이들이 '지도자' 는 아니지만-을 만날 생각은 하지 않고 뉴라이트를 위시한 '종교계' 인사들을 만나서 시시덕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금치산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쯤되면 네티즌 중에 몇명 뽑아서 대화하는 제스쳐라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끝까지 분위기 파악 못하고 부시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형님이 약속 했다고 광고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당선 전의, 공식 외교라인이 아닌 종교계 인맥을 통한 부시와의 면담 추진이 떠오른다. 계엄령 직전의 갑호경계령도 내렸다던데, 사태를 치킨게임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다.
다시 오늘의 과제. 컨테이너 성이 쌓인 세종로에서 우리는 공성전을 할 것인가, 축제를 할 것인가, 이합집산을 할 것인가. 내가 고민한다고 해봐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 논문이나 쓰다가 저녁에 속편하게 가서 시민들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겠다.
그리고 내일, 세상은 바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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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한 척 깔끔떨고 뒷짐지고 있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릴 일도 없을 것이며 고뇌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기만 속에서 완결된 자신의 세계가 깨지지 않는 것은 아마 정말 속편할 것이다.
하지만 루쉰은 말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한줌의 빛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언젠가는 빛을 찾아 밖으로 나갈 수가 있기에.
'촛불문화제' 까지는 정말 고민없이 나올 수 있었다. 전경이 연행을 하지도 않았고 소라광장에 모여 콘서트와 자유발언을 보며 가볍게 2MB를 씹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촛불시위' 가 된 이후로, 그리고 8일 쇠파이프가 등장한 이후로 빠져나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빠져나가겠다는 '나약함'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자들만이 투쟁할 수 있는 세상의 구조 자체가 문제일 게다.
그렇지만 자신의 '나약함' 을 수용하거나 인정하지 못한채 거기에 온갖 '멋진' 미사여구-이성, 합리성, 평화-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그리 좋은 눈으로 바라보기가 힘들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히 생각해보자. 나를 진정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모두가 근본적 비폭력을 주장하는 탈근대 전사들인가? 그런 사람들이 이라크 파병할때는 뭘 하고 있었나.
폭력사태가 여론에 미치는 영향을 걱정하는 것과 폭력을 긍정하지 않더라도 시위에 계속 참여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시위의 '순수성' 운운하며 빠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짜증이 난다.
애초에 민의의 본질이란 것이 있던가? 시민과 운동권의 낡은 이분법에 갇힌 채 자신들의 안전한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자위에는 근거없는 감정적 혐오 이상의 이유가 없다. 생각해보자. '전문 운동권' 들이 작정하고 폭력투쟁 하려고 마음먹고 나왔으면 7일 새벽에 이미 모든 전경버스가 박살났을게다.
자신들이 이미 통합의 제의에 혹해서 참여하였다면, 돌출적으로 나오는 폭력마저도 어떤 방식으로든-말리든 부추기든- 포용할 필요가 있다. 미안하지만 평생 그런식으로 헤게모니에 영합하며 자신의 세계를 부수지 않은채 도피를 하다간 '이성' 의 정점에 오를 수가 없다.
폭력투쟁을 긍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그것대로 고민하고 시위의 대의는 그것대로 고민하고 좀 전략적으로 사고하라는 말이다. '냉철한 이성' 좋아하는 분들이 가장 감정이고 당위적으로 판단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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