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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6/29 과격 폭력 진압 관련 대정부 단독담화문
- 2008/06/12 "'분노의 촛불' 워싱턴포스트,뉴욕타임스 1면 톱 게재" (1)
- 2008/05/24 문국현의 쿠오레
- 2008/05/13 2MB의 디스토피아
- 2008/05/12 초라한 대학생?
- 2008/05/08 그래, 문제는 바로 정치다
현재 촛불 정국에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성을 외치며 촛불에 대해 온갖 논평을 쏟아내는 지식인들과 상당수의 시민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현대 사회에서 관찰자와 행위자를 엄격하게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객관적인 관찰자에 한정 지으려는 이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회인이라면 무릇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유무형의 사회적 책임이 따르는 만큼 그들이 행동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잃을 것은 시간이요 얻을 것은 사명감뿐인 학생이 이미 가족과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인들에게 정의를 위해 소유를 내려놓으라며 윽박을 지르는 것은 설득력도 없을뿐더러 썩 보기 좋은 모양새도 아니다. 하워드 진의 말마따나 이는 성숙하지 못한 행위이며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행위도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 누가 아도르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문제는 '편향적' 인 행위자와 스스로 구분을 지으며 '객관적' 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목소리들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그 파급력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구세력의 신성동맹이 내는 반동적 목소리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후자가 우익 특유의 무지막지함과 정서과잉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진지하게 경청할 가치가 없는 코미디로 수용된다면 전자는 세련된 외양을 무기로 공론의 영역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은 목소리 자체로 현실을 재창조한다. 현재 촛불정국에 대한 여론은 집회에 직접 참여한 시민들의 열정적인 체험담 외에도 수많은 관찰자들의 목소리 또한 가미되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여론' 은 촛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행위를 하지 않는 관찰자들은 무엇을 관찰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이들이 촛불집회의 모든 순간에 현장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열성적인 참여자에게도 힘든 일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몇 번의 참여에 따른 단편적인 인상 혹은 언론 보도 내용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현장의 최전방에 있던 자만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맥락을 스스로 재구성 해보는 정도의 책임감은 가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책임감 없이 단편적 이미지에 휩쓸려 아우성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특히 반동적 언론에서 주어진 이미지에 휩쓸리는 목소리들은 가장 위험하다. 이들 언론의 보도만 보자면 현재의 촛불 정국은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귀족들을 학살하는 혁명의 상황에 가깝다. 전경을 집단 구타하고 인민재판을 하는 혁명적 상황에 대한 목소리는 혁명에 열광하는 목소리와 혁명에 반대하는 그것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란 대부분의 관찰자들은(행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유혈 혁명에는 생래적 거부감을 지니고 있기에 촛불 정국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것이 반동적 언론들의 전략이자 '객관적' 관찰자들의 한계이다. 이들의 폭력비판은 공허하다.
근본주의적 폭력비판은 실질적으로 소용이 없다. 기껏해야 전경과 시민 모두 잘못하였다는 무의미한 양비론으로 빠지거나 '누가 먼저 때렸나' 라는 검증 불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검증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폭력적' 이고 '비이성적' 인 행위자들과 자신들을 대비시키며 '비폭력' 과 '이성' 의 영역에서 훈수를 둔다. 반동적 목소리들은 훈수의 재료를 제공한 뒤 터져 나오는 관찰자들의 세련된 훈수 뒤에 자신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을 숨긴다. 그리고 훈수가 행위자들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잠재웠을 때, 이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은 비수가 되어 관찰자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행위자들을 찌른다. '일반시민' 들인 관찰자의 이름으로.
여기에 관찰자들의 비극이 있다. 이들은 순수하다. 시민에 대한 전경의 폭력과 전경에 대한 시민의 폭력 양쪽 모두에 분노하며 노무현의 악덕만큼이나 2MB의 악덕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노무현 정부 시절이나 2MB 정권 시절이나 '운동권' 들에 대한 강경진압에 무감각한 것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사진예술이 태동하던 시기를 살았던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이미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듯, 맥락이 거세된 단편적 이미지는 이들의 순수함을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만들며 농락한다. 벤야민은 비판정신을 마비시키는 사진의 순간적 이미지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표제를 제시하였지만 이미 반동적 언론들은 자신들만의 맥락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였고 그 세계 안에서 자유자제로 표제를 붙여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의 세계 안에서, 이들의 표제는 사진의 '진실' 을 가장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사와 사진 이미지들로 구성된 반동적 언론의 매트릭스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순수한 렌즈로 관찰을 하기가 힘들게 된다. 직접 촛불 집회에 나오더라도 그것은 어수선한 집단 객기쯤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그 시각은 더 이상 '객관적' 이지 않다. 아마 전쟁터에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진영논리가 작용하는 현실 정치 영역의 권력 게임에서 객관적인 관찰자는 존재하기 힘들다. 행위자 혹은 자원만이 있을 뿐이다. 직접 거리에 나서는 것만이 행위는 아니다. '과격 행위자' 와 '부정적 시선으로 관망하는 시민' 의 형태로 가공되어 나타나는, 행위자와 관찰자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적 인식을 깨뜨리고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신중하고 올바른 관찰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사회참여 행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관찰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변혁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관찰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며 또 다른 길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이에 반해 순간적 이미지에 휩쓸려 감정적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객관적 관찰' 과는 거리가 멀며 어떠한 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행위자들과 애초에 선을 긋고 무책임한 논평, 아니 감정의 배설을 쏟아내는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자기성취적 예언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촛불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신중을 기해 말한 방향제시와도 전혀 성격이 다르다.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허공을 맴돈다면 관찰자들의 목소리는 관찰자 그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유통이 되며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리고 반동적 언론은 그들의 목소리를 시민 대다수의 의견으로 포장하며 또 다시 관찰자들은 그러한 보도에서 '판세' 를 읽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그에 맞춘다.
거리에 나올 용기와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고 판단할 책임감 중 어느쪽도 갖추지 않은 채 '쿨' 한 척만을 하는 관찰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만들어질 미래는 역시 차가운 미래일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현재의 촛불 정국은 확실히 87년 6월과는 다르다. 하지만 87년 대선과 같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자를 택일해야 하는 양자역학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변화 역시 순수한 선과 변혁을 동시에 취할 수는 없다. 그리고 2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보았을 때 '관찰자' 들의 상당수는 최소한 순수한 선을 택할 완고한 도덕주의자들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코를 틀어막고 2MB에게 투표를 하였다면 변혁을 위해 촛불의 몇 가지 소소한 악덕쯤은 감수하고 다시 한 번 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도 '나는 찍지 않았습니다' 를 무기력하게 외칠 것인가.
프레시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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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원본 대국민 '협박문' 부터 감상을 하자.
http://www.frontiertimes.co.kr/news_view.html?s=FR01&no=28791&s_id=9&ss_id=0
자작 대정부 단독담화문
존경이 되지 않는 2MB 일당들!
어제 저녁, 또 다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과격 폭력 진압이 벌어져 시민과 경찰 양쪽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부 전경이 곤봉과 방패로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빈 소화기통과 보도블럭까지 시민들에게 던져댔다. 나아가 쓰러진 여성을 발로 마구 밟는 일까지 발생했다. 참으로 걱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데 대해 깊은 분노의 뜻을 표하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끌려나와 부상을 당한 전의경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시민들은 그 동안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재협상을 주장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한때 2MB는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경청하는 척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의 태도 역시 2MB의 사과문과는 상당히 달라지고 있다. 쇠고기 문제 뿐만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정책들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강행하려 하고 있다. 경찰의 진압 양상도 날이 갈수록 과격 폭력화 되고 있다.
또한 한나라당은 오늘 일요일, 개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성명을 발표하고,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가기 위한 후안무치한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친애하고 싶지 않은 2MB 일당들!
그 동안 시민들은 정부에 대해 정부의 자정능력을 믿는다는 차원에서 평화적인 집회를 위해 노력하며 인내를 갖고 정권퇴진 운동을 최대한 자제해 왔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숙였던 정부가 고소영 강부자 주도의 MB노믹스의 강행, 80년대식 진압을 다시 꺼내들면서 급기야 어젯밤과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가 재발한다면, 시위에 참여한 일반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는 절대로 막아야 한다. 시민들로서는 불법 폭력 과격 진압에 의한 불행한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소화전을 이용하는 등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과격 폭력진압을 조장 선동하거나 극력 폭력행위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기록, 추적해 국민의 심판을 내릴 방침이다. 파괴된 방송장비 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민사상의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 아울러, 한나라당의 망발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2MB 일당들!
이번 시위와 관련해 전의경들의 부모이자 친구인 시민들이 밤낮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젯밤에도 수백명이 넘는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고, 이 중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다.
지금까지 부상당한 시민들은 총 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10개가 넘는 농성천막과 140여 점의 농성장비도 파손됐다.
2MB의 집권이 네 달이나 계속되면서 자영업은 물론 우리 경제 전체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국가신인도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외국 투자자와 관광객들도 발길을 돌리고 있다.
전 세계가 유가급등으로 위기에 몰려있고, 특히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에서 2MB가 대통령으로 있을 경우 누가 우리나라에 믿고 투자하겠습니까?
2MB의 집권은 서민경제를 죽이는 일이고, 그 피해는 묵묵하게 일하고 있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더구나 이런 현실은 아직까지도 시민들께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균형있는 보도가 필요하다. 정확한 정보들이 시민들께 전달될 수 있도록 조중동의 회개를 당부드린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시민들의 고충에도 관심을 갖고 보도해 주실 것을 거듭 요청드린다.
또한 한나라당도 개념없는 성명서를 철회하고, 미 쇠고기 재협상을 즉각 당론으로 정하기 바란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민의를 대변하여야 할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친애하고 싶지 않은 2MB 일당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발전 시키는 데 역량을 모아나가야 할 때다.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가운데 정책을 수행하는 성숙한 국가 운영역량을 보여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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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공고화 되었고 보편의 가치가 된 사회에 살고 있는-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서구인들의 눈으로 보자면 민주주의 혁명은 일종의 '로망' 에 가깝다. 얼마전 사학법 및 종교인 과세 논란이 벌어졌을 때 광신도들이 벌이던 '순교' 퍼포먼스와 같은 맥락선상에 닿아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개신교인들이 신화의 영역에 있는 사도들의 순교에서 뜨거움을 느꼈다면 '민주주의 신도'(비꼬는 의미는 아니다) 가 된 서구인들은 역시 신화가 되어버린,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뜨거움을 느낀다.
87년 6월 항쟁의 열정을 경험적 차원에서 되살리던 한국의 386세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서구인들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을 신화의 차원에서 소비한다. 그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구에서 그렇게 대접을 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라파예트와 제퍼슨을 방불케 하는 민주주의 혁명 신화의 살아있는 주인공이였던 것이다.
결국 서구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산업화' 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 과 '야생의 에너지' 를 읽어내듯, 아시아에서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민주주의 혁명' 의 신화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소비방법은 역설적으로 이들이 현재 국면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 시위를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둘러싼 단순한 '반미' 차원에서의 운동으로 보는 것이 아닌, 2MB 정부의 정책방향과 독선적 국정운영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로서 서술하고 있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배후설을 운운하는 조중동의 기사보다 훨씬 정확하다. '반정부'(조중동은 2MB 정부에 대한 반대와 정부라는 체제 일반에 대한 거부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악습이 있다) 혹은 '반미' 가 아니라 '민주' 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내면에 공고화되지 않은 국내 파시즘 언론들(우파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보다 해외 언론의 민주주의에 대한 로망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역설이 발생한다. 외신을 보는 것은 제 3자의 시각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그 장점이 있긴 하지만, 우리의 펜이 아닌 푸른 눈 속에서 우리의 실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뉴욕타임스에서 발췌-
For the past 40 days, central Seoul has been rocked by demonstrations , which began as rallies by hundreds of teenage students, singing, dancing and holding candles to protest the importing of American beef. They have now evolved into a protest against government policies on education, health care and consumer pr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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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역할은 시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치인은 시민들에게 정치를 통해 각각이 원하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과 함께 변화의 방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요새 유행인 CEO 담론에 비추어 보더라도, 소비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소비자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회사의 의무이다.
하지만 실제 회사들은 어떻게 하면 소비자를 세련되게 등쳐먹을 지에 대해서만 궁리(나에게 좌빨이라고 하지 말기를 바란다. 자그마치 애덤 스미스의 말이다.)하는 것처럼 정치인들 역시 유권자를 등쳐먹어 표만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서만 궁리하는 듯 싶다. 나는 창조한국당과 자유선진당의 합의 내용을 보며 욕이 먼저 나왔다.
물론 대선때에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총선때에는 진보신당을 지지한 '골수 좌파' 인 내가 문국현에게 실망했을 리는 없다. 사실 모두가 경악하고 있지만 창조한국당과 자유선진당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국가 코포라티즘과 가부장적 온정주의의 조합은 '인간의 얼굴을 한' 박정희 체제에 다름 아니다. 좀 더 자세하게 보자.
문국현은 한 회사의 CEO 였던 만큼 정치의 문법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의 문법은 정략을 말하는 것이 아닌, 민주적 리더십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정당 운영방식을 보자면 민주적 리더십과는 꽤나 거리가 멀다. 이번 사태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당원들의 의견 수렴은 '나중' 이고(게다가 대다수의 당원이 지지할 것이라는 예언까지 한다)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방식은 정치의 미덕이 아닌, 경영의 미덕이다.
뜬금없는 웹 2.0 시대까지 들먹이며 나름의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확실한 것은 창조한국당의 당내 소통 구조는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공천파동까지 터졌겠는가. 그리고 경제를 살리는데에 이념에 상관없는 '왕도' 가 있다는 문국현의 사고 방식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다. 정치는 방법의 대립이 아닌 방향의 대립이다. 누구의 경제를 살리자는 것일까?
CEO의 방식과 등치되는, 경제살리기라는 가치를 위해 국가의 소속원들을 통합시키려는 문국현의 비전은 전형적인 국가 코포라티즘이다. 전문성 있는 CEO 대통령이 있으니 재계와 노동계는 믿고 따르라는 것인데, 그나마 그가 어필할 수 있었던 점은 온정주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약자의 불만을 무마시켜야 한다. 문국현의 유일한 장점은 약자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데에 있어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방식이 아닌, 약자의 객관적 조건을 향상시켜주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부장적 온정주의 역시 사회 통합을 기치로 약자들에게 '따뜻함' 을 베풀어주는 것을 의무로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노동자는 착취를 당하지만 자신에 대한 사장님의 따뜻한 배려에 감동을 먹으며 노사는 화합하여 경제발전에 매진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게임에서 '20세기의 유물' 인 이념미까지 챙겨먹는 주체는 다름아닌 국가이다. 국가는 재계와 노동계에 '노력영웅 호칭' 혹은 '스타하노프 상' 따위를 부여하여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만 하면 된다.
모두가 총화단결하여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쿠오레의 세계 속에서 문국현과 이회창은 서로의 '진정성' 에 눈물을 싸지르며 하나가 된다. 그러니 문국현에 대해서는 실망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회 생산물의 분배방식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그의 발언-"꼭 합이 정해져있고 그것을 분배하는 역할만 남아있다고 하면서 갈등을 조장하는 쪽으로 가는 건 구시대의 유물이다"-을 보며 더 이상 희망을 가질 것이 있던가? 생산과 분배의 단절적 대립구도는 조중동의 세계관이 아니던가.
내가 문국현에게 욕을 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에게 희망을 걸었던 건강한 가치 지향점을 지녔던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려 희망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이제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욱 심화되고 그 자리는 문국현이 그토록 싫어하던 거리에서의 '사회 혼란' 혹은 시장이 채울 것이다. 노무현에게 실망했던 사람들이 정치혐오 혹은 2MB의 신화로 도피했듯이 문국현 역시 자신의 지지자들을 도피하게 만들었다.
행동에 있어서 지지자들과의 소통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부터 하고 보는 문국현의 방식은 2MB와 다를 바가 없다. 최장집 교수가 한미 FTA 에 대해 그 내용 자체보다는 민주적 절차의 측면에서 비판을 하였는데, 문국현 역시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옳아 보이더라도 그 추진에 있어서는 지지자들과 소통을 하며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적 리더십을 지닌 정치인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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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호 변호사의 꼼꼼하고 친절한 영어강의 덕분에 광우병 파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아마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에게 해석을 맡겼어도 '오역' 은 없었을 것이다. 글로벌을 강조하는 2MB로서는 여간 '쪽팔린'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것을 빌미로 전국민에게 영어몰입교육의 필요성을 홍보 할지도 모르겠다. 히틀러가 그랬듯이 자기가 저지른 일을 자기가 수습하며 그 효과를 강조하려는 것인데, 그래도 거리로 쏟아져 나올 줄 아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20세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민들보다는 똑똑하니 다행이다. 2MB의 대내수행력 확보는 당분간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오늘 친구에게 협상단의 오역만큼이나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강남의 중학생들이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릴때부터 대학의 외국인 입학 전형을 노리고 교육받은 아이들은 생각 자체를 영어로 한다는 것인데, 제국의 언어를 쓰는 식민지의 엘리트들과 토착언어를 쓰는 피지배 계층이 떠올랐다면 너무 과도한 경계심일까. 게다가 더욱 위험한 것은 이들이 이끌어갈 한국의 미래이다. 영어와 한글 양쪽 모두를 완벽히 구사할 수 없는 그들이 과연 언어를 이용한 높은 추상층위의 사고를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아마 대다수가 테크노크라트가 될 것이다. 그럼 테크노크라트에게 역할을 배분하는 '지도자' 는?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2MB?
이대로 간다면 2MB가 만들어갈 미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꼴통' 정부와 그들을 뒷받침하는 노란피부 하얀가면의 엘리트들, 그리고 이에 좌절하고 저항하는 일반 시민들로 구성될 것이다. 2MB 짜리 두뇌와 빈곤한 언어능력의 테크노크라트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 자연히 결과물은 없을 것이며 시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2MB 정부의 현재 행각으로 보아서는 독재를 하고 싶어도 특유의 무뇌성과 촌스러움으로 인해 선동 혹은 세뇌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끊임없는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은 합의 도출을 위한 갈등이 아닌, 서로의 존재를 놓고 벌이는 계급투쟁. 시민들의 저항으로 인한 대내수행력 확보의 실패와 제국에 대한 충성심에 자발적으로 포기한 대외자율성의 부재가 어우러진다면 그것은 국민국가의 존립요건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다.
최장집 교수는 2MB 당선 직후 그것을 민주주의의 후퇴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지만 2MB 정부의 꼴통짓은 성실한 노학자의 상식적 예상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그가 얼마전 독재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오랜만에 현실정치에 나선-총선 당시 노회찬, 심상정 선거유세 지원- 이유는 아마도 2MB 정부의 행각을 보며 느낀 황당함일 게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책임성의 부재를 이유로 예리한 비판을 수행했던 그가 2MB 정부의 독선과 아집에 대해서 느꼈을 당혹감은 짐작이 된다. 국민의 의사를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눈과 비 정도로 생각하는 위인이 '섬기는 리더십' 을 주장하는 초현실적인 상황은 진보대논쟁 당시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아봐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다' 던 손호철 교수의 말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아마 2MB가 현재 구상하고 있는 정책들을 모두 강행한다면 앞으로 5년 이내에 올 세상은 완벽한 디스토피아. 그것도 2MB 수령님을 모시고 할렐루야를 외치는 우민들의 천국이 아닌,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느끼는 정치의식이 깨어난 시민들을 볼모로 잡고 있는 디스토피아이기에 더욱 암울하다. 그래서 현재의 탄핵 움직임은 중요하다. 그것이 탄핵까지는 가지 않더라도(사실 누가 뒤를 이어도 2MB보다는 나을게다) 2MB에게 책임성의 원리라는 방울을 채워야 한다. 이번 움직임이 죽는다면 2MB 를 위시한 꼴통, 반동, 수구세력들의 반격은 더욱 거세질터. 이번이 마지막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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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간 이어진 촛불집회는 한국 시민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이것에 대해 다중을 언급하며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이 출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과도한 낙관론일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 맹아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번 집회에서 가장 고무적이였던 것은 10대들의 참석이다. 물론 '괴담' 수준의 소문이 돌고 그에 부화뇌동하여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언제 '괴담' 은 커녕 '정론' 에도 10대가 거리로 나왔던 적이 있던가. 내 기억으로는 4.19를 제외하고는 없다. 10대들을 반김반핵 집회에 '동원' 하지 못한 것은 반동세력의 무능인 것이지 10대들의 무지는 아니다.
여하튼 10대들이 '거리로 나섰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굳이 '거리' 일 필요도 없다. 친구들과 연대하여 '반항의 목소리' 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미래의 희망이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반동세력의 조직적 음해와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10대는 정말 멋지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문제는 20대, 특히 20대 초반이다. 이번 집회에서 20대 초반 학생들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10대는 진보신당 화이팅을 외치고 3,40대 회사원들이 박카스와 후원금을 주고 가는 동안 20대 대학생 커플은 '진보신당이 어디야' 를 말하며 지나쳤다.
'무식한 대학생' 이라고 화낼 힘도 없다. 최소한 정당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그들의 무식을 탓하기 보다는 '왜 진보신당은 대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의제를 선점하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생산적이니 말이다.
사실 내 주변을 보면 대학생들 역시 이번 문제에 대한 공감대는 충분히 형성되어 있는 듯 하다. 10대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없는 움직임' 이라고 경멸을 보이며 자신은 고매하게 상아탑에 박혀 있겠다는-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대학생일 수록 대부분 상아탑의 학문과는 거리가 멀게 무식하고 멍청하고 천박하다- 몇몇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그들이 거리로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물론 취업준비, 토익시험준비는 바쁘리라. 하지만 최소한 그들에겐 그들을 막는 교장과 학생주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물론적 제약을 뚫고 나온 10대들 앞에서 관념론적 제약을 들먹이는 20대는 다소 초라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곧 평생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너무 타박하기에는 미안해진다.
그렇다면 또 무엇이 문제인가. '같이 나갈 사람' 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결정적 문제인 듯 하다. 개개인은 도서관에서 열심히 취업준비를 하다가도 과 친구들과 작당이 되면 수업을 째고 놀러나갈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의 대학생들이다. 여기서 대학생들이 친구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한 사회에서 개인주의의 척도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의 수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확실히 개인주의가 부족한 사회임이 분명하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대학생의 사진이 '아웃사이더 갤러리' 의 짤방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집회-게다가 한국의 집회 문화는 개인이 가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에 혼자 나가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면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집회에 같이 나갈' 친구들을 구하기도 힘들 것이다. 평소 같이 다니는 친구들에게 '무슨무슨 집회 있는데 같이 나갈래' 라고 하기도 힘들 뿐더러, 그 이전부터 MB에 대한 의견을 나눌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일상에서의 정치적 담론의 터부시가 대학생들을 고립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다.
MB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들이 또래집단 내에서 유통될 수 있는 10대는 분명 현재 대학생들과는 다른, '연대' 의 경험을 가지고 사회에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 에 대한 터부가 아닌, 정치행위가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사회에 나오게 될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갈 사회는 분명 현재의 대학생들이 만들어갈 사회와는 다를 것이다.
하나의 화두가 도출된다. 대학생들은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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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표현에 따르면 잃어버린 10년에서 벗어난 오늘날, 시민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삶과는 별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이라는 국가주의의 제전에 기꺼이 동참하며 전국을 붉은 혼란 속에 빠뜨렸던 시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 반대 시위에 대해서는 '교통에 혼잡을 주고 시끄럽다' 고 투덜대던 시민들이 다시 한 번 거리로 나섰다. 이번에는 자신의 삶과 유리(遊離)된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생존권, 더 나아가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10년 만에 일어선 것이다. 96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투쟁에 나섰던 400만 명의 인원들이 1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청계천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민들의 움직임에 기존의 모든 세력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신들을 외면한 국민에 대한 배신감에 휩싸여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던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뛰어넘은 움직임 앞에서 당황하고 있으며, 이 흐름에 편승하여 한몫 챙겨보고자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나서는 봉건적 반동 세력들과 얼이 빠진 채 '이것은 문화제가 아니다' 만 뇌까리는 세련된 신자유주의자들의 모습은 차라리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세력들도 집권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들의 직접적 저항을 받고 있는 청와대의 졸렬함에 비하면 현재의 상황에 나름대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와대에서 나라의 기둥을 갉아먹는 서생원과 그를 호위하는 반동적 언론들은 이 모든 것을 광기에서 나온 한낱 악몽으로 치부하며 그 악몽을 연출하는 '배후세력' 을 상정하여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다. 눈이 뒤집힌 채 허공에 총질을 해대는 이들의 모습은 악귀 김정일 장군을 내쫓기 위해 박정희 장군신을 접신(接神)하고 작두 위에서 칼춤을 추는 장군보살에 다름 아니다. 노력은 갸륵하지만 병은 악귀 때문이 아니라 세균 혹은 바이러스, 그것도 아니면 변형 프리온 때문에 일어나는 법이다. 망상 속의 배후세력을 찾는 것보다는(아마 배후를 거슬러 올라가면 프리메이슨까지 나올 게다) 국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핵심 기제들을 찾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사태의 진정을 위해서라도 훨씬 효과적인 일이 될 것이다.
상기하자. 현재 '광우병 괴담' 이라고 불리는 내용들의 상당수는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 FTA 반대운동 당시에 제기되었던 것들이며 그 당시에는 범국본과 민노당이라는 거대한 '배후세력' 까지 뚜렷하게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그 당시 시민들은 어떠했던가. 지금 운송노조의 소고기 운송 반대에 열광하는 시민들은 당시 민노총의 FTA 반대를 위한 '정치파업' 을 비난했던 시민들이며, 지금 강기갑 의원의 호통에 열광하는 시민들은 당시 민노당을 간첩당이라 비난했던 시민들이다. 이들이 갑자기 상부의 지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거리로 나오는 마리오네트라도 된 것일까. 반동세력이 지목하는 배후세력은 언제나 존재하는 상수였으며 도출되는 값이 변한다면 상수 대신 변수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마 그 변수는 반동적 신성동맹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청와대 자신일 것이다.
물론 청와대와 반동적 언론들의 주장대로 사실을 왜곡한 선동이 다수 존재하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자료들 중 상당수는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정론인양 호도하는 것과 사실 자체의 왜곡은 지양되어야 마땅하며 이러한 선동에 대해서는 진보진영에서도 과감하게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점은 반복되는 실험과 토론을 통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주동자를 찾아 형사처벌 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아마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사상의 경쟁을 회피(그 경쟁 좋아하시는 분들이 이런 문제에서는 철저한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전도사가 되곤 한다)하려던 악습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모양인데, 최소한 내 기억으로는 선동의 원조는 한나라당이다. 세금폭탄이라는 레토릭과 747공약은 허위, 과장, 왜곡이라는 선동의 삼위일체가 훌륭히 갖추어진 작품이 아니었던가.
반동세력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긴 수면에서 깨어나 다시금 정치의 주체로 부상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두려워서이다. 민란(民亂)이 우려된다는, 친박연대의 봉건적 세계관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발언은 비록 그 의도가 이명박을 압박하기 위해 나왔음에도 오히려 이명박과 그 '배후세력' 들의 속내를 대신 표현해준 셈이다. 배후세력설과 형사처벌을 들먹이며 시민을 윽박지르는 이들의 속내에는 한국 시민들의 이성적 판단능력과 저항정신을 하찮게 보는 극도의 오만이 잠재되어 있다. 집회에 끼어 한몫 보려는 세력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시민들, 죽음의 공포에서 연유한 패닉상태 대신 건강권을 팔아먹은 대통령에 대한 건강한 분노를 보여주는 시민들, 경찰의 협박에 재치 있는 말로 응수하는 예비시민들이 배후세력의 조잡한 선동에 놀아나고, 졸렬하다 못해 야비한 엄포에 주눅들 것 같은가?
운동의 초기에는 선동도 있었으며 비이성적인 군중심리에 휩쓸린 측면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정태적인 존재가 아니며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구조의 질곡 속에 있는 것도 인간이지만 구조를 바꾸는 것 역시 인간이다. 선동적인 자료에 의해 광우병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 시민은 곧 스스로가 여러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을 내리며 중심이 없이 모인 대중은 스스로가 집회의 양식을 만들어간다. '시민' 은 고정된 속성을 지닌 존재가 아닌 만큼 이들의 움직임을 볼 때에도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난 5월 2일, 탄핵이라는 빈곤한 어휘만이 존재하던 집회는 후반부에 이르러 '조중동은 쓰레기' 라는 매우 강한 정치성을 지닌 구호까지 등장하였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방어라는, 지극히 본능적인 속성에서 출발한 시민들의 사고가 이제는 자신들의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결국 정치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다. 광우병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분노는 공공사업 민영화에 대한 우려까지 이르고 있으며 이를 싸잡아 '괴담' 으로 취급하며 진화(鎭火)하기 위한 반동 언론들의 몸부림은 안쓰러울 지경이다. 동맹휴학을 호소하는 자기성취적 예언에 대해 '허위' 라는 규정를 내리는, 이성이 마비된 행태를 보이는 경찰의 행태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움직임에 온갖 푸닥거리를 하며 저주를 퍼붓는 이들의 행태를 보며 그 어떤 지식인도 계몽으로 이루어내지 못했던, 모든 권력집단의 반동성에 대한 각성을 이루고 있다.
지난 10년간 잠을 자고 있던 시민이 깨어날 때는 지금이다. 널리 알려진 말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사회적' 으로도, '정치적' 으로도 번역되어 인용되곤 하는 이 말에서 사회적-정치적에 해당하는 그리스 원어는 '폴리스적' 이라는 뜻이다.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 공동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사회와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결국 대한민국 시민사회라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사는 시민들은 내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체적이면서도 소박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며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단, 경계해야 할 점에 대한 성찰 없이 마냥 위대한 시민의 힘만 찬양할 수는 없는 것도 현실이다. 시민들의 열정은 정치적 언어를 통하여 정제되어야 한다. '독도를 팔아먹은 이명박' 을 외치는 국수주의적 반동성과 '조중동을 불태우자' 를 외치는 급진적 혁명의 맹아가 뒤섞여 태동하고 있는 현재의 움직임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람시가 말한 '현대의 군주' 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시민의 집단의지를 대변하는 동시에 이들을 단순한 경제투쟁이 아닌 헤게모니 투쟁으로 이끌며 사회 전반의 의식 개혁을 이루어내는 존재.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를 넘어서 투자자-국가 제소권이 걸려있는 한미 FTA에 대한 반대,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 신자유주의적 사회재생산 구조 및 욕망 자체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현대의 군주' 는 그람시의 당 개념과는 그 전술과 형태가 다소 다를지는 몰라도 여전히 정당의 형태를 띌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서 나가면 산 자는 따르라는 식의 구태의연한 지도방식이 세련된 시민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은 지난 10년간 지겹도록 입증이 된 만큼, 오늘날의 '현대의 군주'(다소 권위적인 냄새가 풍기는 '현대의 군주' 대신 누구의 표현대로 '현대의 머슴' 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는 앞장서서 시민을 이끌기보다는 시민의 옆에서 소통하며 이들의 의지를 정제하여 대변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맹목적인 포퓰리즘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서로가 믿음이 전제된 건강한 거리를 두어야 함은 당연한 전제이다. 이런 면에서 시민과 정당 역시 서로가 서로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피드백 관계가 완전히 부재한 것이 작금의 사태를 낳았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리라.
현재의 정부에 대한 분노는 자신들의 생명권을 고려하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함에서 기인하였으며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자신들을 속 시원하게 대변해주는 정치세력이 없는, 협애한 이념지형에 갇힌 한국 정당들의 대표성 부재 때문이다. 이들의 열정이 향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해주는 것은 순전히 정치의 의무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시민들을 생각하는 진보세력이 할 일의 목록이 도출된다. 시민들의 의사에 적극적이고 진지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조직화된 세력의 역량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목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것, 그리고 시민들이 스스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이들을 2MB 의 뇌용량을 가진 정부와 경찰로부터 지키고 이들의 사회적-정치적 열정의 불꽃에 풀무질을 하는 일이다.
프레시안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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