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8/21 올림픽이라는 유령
  2. 2008/07/23 독도의 미로
  3. 2008/07/21 요동치는 민족주의 (2)
  4. 2008/07/17 내셔널리즘의 덫 (4)
  5. 2008/06/23 국가주의, 민족주의 (1)
2008/08/21 11:05

올림픽이라는 유령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알퐁소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시대적 배경은 1871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게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패배 이후 프랑스의 철광지대인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하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근대 올림픽의 역사 역시 이 사건에서 시작된다.
 
  당시 7살의 어린 나이였던,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가슴 속에 프랑스의 패배는 깊숙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패배가 국민의 마음 속에 있는 나약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쿠베르탱 남작은 훗날 체육교육의 보급에 힘을 쏟게 된다. 근대 올림픽은 체력은 곧 국력이자 자기계발의 수단이라는 쿠베르탱 남작의 신념이 지덕체(智德體)의 합일을 이상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라는 소재를 접하고 가장 총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요컨대 근대 올림픽은 제국주의 시대의 국민동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쿠베르탱 남작에게 영감을 준 19세기 영국의 체육교육은 식민지 개척에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성장소설은 복싱 등의 스포츠를 통한 자기계발과 남성으로서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곧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폴리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군인이었다.
 
  결국 근대 올림픽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의 강조는 전 국민을 언제든지 동원 가능한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지 흔히 생각하는 국민체육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19세기와 오늘날의 차이는 여성도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군국주의적이라고 하여 현대 올림픽 역시 국민을 군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자본과 세계화라는 변수가 끼어들어 근대 올림픽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월드컵과 대비되는 올림픽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팀이 존재하는 인기 스포츠의 비중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여기서 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의 행복한 공존이 나타난다. 축구와 같은 인기 스포츠에서는 국제 경기가 열릴 때 프로팀 및 선수 개인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된다. 예컨대 호나우도와 같은 스타선수에게 자신이 소속된 프로팀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과 국가 대표팀의 훈련에 열심히 참여하여 모국이 국제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택일해야 하는, 상호 배치되는 일이다. 선수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면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은 자본과 국가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는 소속팀이 곧 국가이기에 팀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다. 국가는 이들을 국가를 위한 대리전을 치르는 전사로 훈련시키고-아마 프로팀에서 한국 양궁 대표팀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다면 법정 소송까지 걸릴 것이다-자본은 이들의 스폰서를 자처하며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활용한다. 호나우도의 슛은 대부분의 경우 국가보다는 자본을 위한 것이지만, 김연아의 연기는 국가와 자본을 모두 만족시킨다.
 
  선수를 둘러싼 국가와 자본의 공모는 올림픽 행사 자체로도 이어진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적 제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총력전이기 때문에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스포츠 과학' 이라는 이름의 첨단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가동하는 데에는 스포츠 용구 제작회사들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함에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게다가 공식후원업체 인증이라는 '독점권' 의 보장과 '올림픽 특수' 는 자본의 이윤을 위한 국가의 노골적인 러브콜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더 이상 지덕체가 합일된 이상적 인간(군인)의 육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인류 보완계획보다는 차라리 로마인에게 제공되었던 '빵과 서커스' 에 가깝다. 그리고 '빵과 서커스' 의 생산은 대부분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국가는 이들에게 독점적 이윤을 보장한다. 오늘날의 올림픽 행사 자체에서는 쿠베르탱 남작이 내걸었던, 다소 구시대적인 이념미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기치를 내건 올림픽 개막식을 무색하게 하듯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거장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스펙터클한 개막식은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 국가와 자본이라는 근대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올림픽을 즐긴다.
 
  물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올림픽은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으며 그것들은 자본과 국가의 얼룩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빛난다. 어떻게 포장이 되었든간에 선수 개개인은 자신과의 싸움에 임하는 것이며, 그러한 선수들의 노력과 성과를 진지하게 지켜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품위 있는 일이다. 박태환의 선전과 펠프스의 장애 극복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가 올림픽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선수 개개인들이지 올림픽 그 자체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결이라는 내셔널리즘의 틀이 없더라도 펠프스와 박태환은 개개인도 그렇고 그 둘의 대결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다행히도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올림픽 기간에 자행된 2MB의 폭거는 하나하나가 평소였다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일들이다- 정부와는 별개로 한국 시민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태도는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외국 선수들의 선전에 대한 솔직한 감탄과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야 올림픽을 국가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닌, 순수한 스포츠로서 즐기는 데에 가까이 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인해 개혁에 실패한 뒤 빵과 서커스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던 로마 공화정의 몰락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희생당하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하여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중국이 주최하고 초국적 자본들이 공모하여 전 세계에 제공한 올림픽이라는 빵과 서커스의 뒤에는 어떠한 아픔과 증오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라는 이름의, 올림픽이 강조하는 국민공동체 내부의 아픔과 상처 역시 마찬가지이다. 2MB 가 태극기를 거꾸로 흔들며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을 때,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 끝에 병원으로 싷려갔다. 기륭을 모르고 올림픽에 열광하는 한, 우리 모두는 2MB와 공범이다.  


프레시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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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8:32

독도의 미로

  조그만 바위섬 하나 때문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현재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2MB 정권의 각종 모략들이 민중의 삶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다소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할지도 모르는(천연가스? 어차피 채굴권은 시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독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눈 뜨고 코를 베일 수는 없기에 우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를 대신하여 독도 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걱정에 반응하듯 국회에서는 '대마도 특별법' 을 발의하고 '해병대 파병' 을 이야기하는 등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그 열기와 비장함만 보자면 마치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실지회복운동)라도 보는 기분이다. 그 열기가 생각할 수 있는 대뇌의 피질까지 모두 태워먹은 것 같아서 문제이긴 하지만. 감정적 반발에 기반한 저러한 '쇼' 는 독도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본 우익단체들이나 할 법한 발상을 의회가 앞장서서 법안의 형태로 내놓는 것을 보고 있자면 왜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지 이해가 된다.
 
  상당수의 시민들도 잘하는 것 없으니 정치에 대한 냉소부터 날리는 건 자제하자. 독도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우물 안 개구리' 들의 총체적 문제이지 특정 집단의 두뇌 프로세스의 문제는 아니다. 하긴 앰네스티에 대해 법적 고발을 운운하는 경찰청장-세계제국 미국의 국무부 장관도 차라리 무시를 하면 했지, 앰네스티에 대해 법적 고발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게다-과 앰네스티가 UN 산하 기구가 아닌 NGO 라는 이유로 '편향된 운동권 단체' 쯤으로 생각하는 '촛불데모 반대' 시민들이 진치고 있는 사회에서 독도문제에 대해 국제적 감각을 지닌 신중한 대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촛불정국에서 명성을 드높인 HID는 일본대사관 공격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사회든지 사회의 평균적 수준에 뒤쳐진 부진아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니 일본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뉴라이트 등은 무시하고 자정능력이 있는 시민들끼리 생각해보자. 일단 우리의 급선무는 머리에서 김을 빼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본질적으로는 공생관계이긴 하지만 허구한 날 봉고차에 확성기를 장착해 다니는 일본 우익 단체의 장단에 놀아날 필요가 전혀 없다. 어차피 공식적인 일을 추진하는 일본 정부는 중요한 순간에 우익 단체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며 연막전술을 구사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일본 우익 단체와 비슷한 형태로 민족주의적 분노를 표출하던 한국인들만 덩그러니 남아 우스워지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 흐름을 손 놓고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라 타깃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 정부에 대한 각종 규탄대회가 이어지고 모 대학 총학생회는 독도에 직접 방문하는 쇼까지 벌였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영토 내에서의 불만 표출로 움직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즉, 국내에서 2MB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촛불집회를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그렇다고 일본 원정투쟁을 계획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한국 내에서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움직임은 반일감정으로 비화되어 일본 우익들만이 아닌,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에게까지 위기감을 느끼게 하여 일본 내 여론을 악화시킬 위험까지 있다.
 
  우리가 국내에서 공격해야 할 것은 독도에 대한 공작을 펼치는 일본 정부가 아닌, 그 공작에 맥을 못 추고 있는 정부의 독도 대책 그 자체이다. 현재 정부든 의회든 시민이든 독도에 대한 대처방안은 일국적 시야 내에 갇혀있다. 우리들끼리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의지를 다지고 사실을 재확인하는 궐기대회를 하면 독도가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일본 정부는 이전부터 국제사회에서의 치열한 로비와 홍보를 통해 자국의 역사관을 확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일본의 표면적 모습, 즉 일본 우익들의 난동에만 주목하여 '독도는 우리 땅' 이라는 대내적 홍보에만 주력하였고(그리고 2MB 본인은 사업가 시절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 유력 정치인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 같다) 시민들 역시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 이라는 장밋빛 환상 속에서 주기적으로 궐기대회를 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아마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넘기는 데에 한국 정부가 그렇게 정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일본이 행한 국제적 홍보 덕택에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테니. 그렇지만 아직 독도에 대한 좋은 자료들은 많이 남아있다. 역사는 해석의 싸움인 만큼 기존의 자료들을 최대한 꼼꼼하게 검토하고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제 3자가 처음 듣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는 논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정부의 합리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것과 동시에, 독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우리의 논리를 만들어 해외에 널리 홍보하는 일이다. 단순히 한국인들끼리 모여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이라는 자위에 그쳐서는 독도를 지킬 수가 없다.
 
  급격한 우경화가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공세는 '국제호구' 2MB 라는 호재를 만나 독도 문제 외의 문제들까지 제기하며 전방위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사안이 터질 때마다 단순히 일본을 규탄하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인 반일감정을 되살려 우리 내부의 증오의 에너지만 강화시킬 뿐 아무런 실제적 효과도 내지 못한다. 아니 그것이 또 일본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막장의 나선을 걷게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든 이상적으로든 우리는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현재 일본정부가 성실하지 못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문제지만, 일본 내의 양심세력들과 우경화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과의 연대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가능하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우경화 된 것은 일본 시민들이 뽑아준 것이기 때문에 일본 시민들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2MB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시민들보다는 믿을 만할 것이다. 일본과의 장기적 관계까지 고려한다면 독도에 대한 대응은 더 이상 일면적인 틀에 갇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독도에 대한 대응은 그것대로의 전장을 분리하고-아마 역사학계와 국제정치 무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그 외의 영역에서는 그것들 나름대로의 관계를 유지하면 된다. 아마 2MB는 대일관계에 있어서 실용적 태도를 취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지만, 그는 독도 외의 영역에 대한 친선유지를 위해 일본의 우경화마저 싸잡아 '친선' 의 이름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등장하여 공화국에게는 허용되지 않던 외교적 성과를 이루어내며 전 국민적 열광을 끌어내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히틀러이다. 대내적 정책실패와 대내적 외교실패로 외통수의 처지에 놓인 2MB의 구원은 과연 마술적 지도자에게서 나올 것인가 아니면 시민들에게서 나올 것인가.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총체적 난국 속에서 매우 강한 강도로 터져 나온 독도문제는 앞으로의 시민사회의 흐름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평화적으로 독도를 지켜낼 수 있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역사의 전장' 을 선택할 것인지, 무력충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물리적 현실 세계에서의 원초적 반일감정의 폭발을 선택할 것인지는 모두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프레시안 게재

p.s. 독도 문제를 떠나서 시사IN 이번호(45호)는 꼭 사서 보기 바란다. 독도 문제 뿐만이 아닌, 다양한 충격과 공포의 기사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이 글도 시사IN 이번호를 보고 필받아서 급하게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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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미로  (0) 200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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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1 16:37

요동치는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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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오후 3시에 캡쳐한 싸이월드 메인 페이지 뉴스들이다. 굳이 강조표시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 캡쳐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몹쓸 외국인' '동남아男' '日규탄' 등의 자극적 어휘로 표현된 각각의 기사들은 하나의 말을 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내셔널리즘.

기사를 하나씩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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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교인지라 보자마자 시껍해서 기사를 클릭하니 합성으로 믿고 싶어지는 이미지가 나를 맞이하였다. '대마도' '독도의 날' '침략주의' 등 별로 근거는 없는 가치판단적 어휘들이 나열된 피켓을 들고 확성기까지 준비해온 저 사람들을 보라!

 사실 나로서는 독도에 대해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제정치학적인 문제에 대해 거창한 '역사' 를 들먹이며-아마 자신들이 아는 '역사' 대로 영토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순진한 발상에서 나온 생각일 것 같은데, 근대 국가의 영토가 어디 '역사' 대로 정해졌는가? 아니 그 '역사' 라는 것 자체가 하나만 존재 가능한 것인가?- 민족주의적 감정을 불태워봐짜 남는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독도문제에 대해서 본 글 중에 가장 합리적인 글은 다음의 2개였다.

쇠고기, 금강산 그리고 독도
꽉 막힌 독도 문제, 확 뚫을 방법은?

 아, 그리고 고대 총학은 아예 독도를 갔다고 한다. 올해 정기 연고전은 아예 독도에서 개최해도 좋을 것 같다.

 기륭전자와 홈에버 투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총학생회라는 것들이 저러고 있으니 참 걱정이다. 아예 학생 복지에만 신경쓸게 아니고 사회적 목소리를 낼 것이라면 실제적으로 의미도 있고 효과가 있는 쪽으로 내야 할 것이 아닌가. 저런 짓 할꺼면 그냥 학내 청소나 해라.
쪽팔려 죽겠다.

 다음은 자그마치 '몹쓸 외국인' 과 '동남아男' 에 대한 기사에 달린 베플들이다. 기사의 내용인즉슨 불법체류자가 약을 이용하여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과 동남아 남자들이 한국인 정신지체 여성을 강간하고 결혼하여 영주권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기사 내용보다는 베플이 더욱 살펴볼 가치가 있으니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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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재미있으면서도 무섭다. 내 기억으로는 유영철 사건에 대해서는 '한국인' 을 들먹이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나 이주노동자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그 범죄는 그들의 일반적인 '민족성' 을 대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동남아인' 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나라에서 허구한날 섹스관광을 즐기는 한국인들은 발정난 민족으로 보일게다.

 외국인이라고 욕할 것 없다.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경제발전 단계가 낮아 전근대적 요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국가 혹은 계급들의 일반적 특성이니까. 빅토리아 시대 영국 부르주아들은 SM 클럽을 애용하였고 파리의 노동자들은 창녀와 뒹굴었다. 아, 그러고보니 한국도 미아리가 있다. 현재도 한국의 블루칼라들은 도우미 노래방을 매우 애용한다. 그리고 화이트칼라는 룸살롱. 해소하는 방법이 '합법적' 이냐 '불법적' 이냐의 차이이지 근본적인 발정난 심리는 동일하니 괜히 같잖게 민족성이네 근성이네 운운하지 말고 성평등 의식 확산에나 노력하는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내가 아는 선에서는 저 리플들에서 '불법체류자' 를 '미군' 으로 바꾸어도 팩트가 별로 바뀌는 건 없다. 불체자를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난리를 친다면 이어서 주한미군 철수투쟁이라도 할 것인가? 이건 민족성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교양의 문제이다. '불쌍한' 불법체류자들과 성폭행범은 서로 배타적인 요소가 아니다. 상기하자. 가정에서 폭군이였던 유신세대의 가부장적 아버지들은 모두 고된 노동을 하던, 국가의 착취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들이 모두 '악마' 는 아니었고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동운동을 하였듯, 이주노동자들 역시 젠더적 관점이 결여되었을 뿐 그 자체가 총체적 악의 인격체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급적 관점을 망각한 내셔널리즘의 광기는 한국인 혹은 백인에게 강간당한 여성들은 헤픈 여자-아마 백인과 '놀아나는' 여성에 대한 비난은 상당부분이 제국의 시민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일 것이다-로 만들며 유색인종에게 강간당한 여성은 순식간에 '민족의 순결한 누이' 로 탈바꿈시킨다. 전자는 꼬리를 먼저 친 것이 되지만 후자는 우리 민족의 착한 심성으로 동정심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 되는 셈이다.

 이런 제노포비아적 경향이 강화되는 것은 그만큼 경기가 어렵다는 것의 반증이리라. KKK 단은 노예가 노동자가 된 후 노동력을 확보하기 어렵게 된 남부의 반란. 수정의 밤은 초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붕괴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반란. 세계 어느곳의 역사를 보더라도 삶이 피폐해질 수록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기 보다는 타자에게 가상의 악마를 투사하여 그들을 공격한다. 특히 즉자적 계급의식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한국에서 타자는 필연적으로 '국민' 이 아닌 존재에 투사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가지만 명심하자. 우리가 유색인종을 보는 시선은 바로 백인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다. 진중권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 제국의 시대에 누렁이들이 좋아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누런피부 하얀가면의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현실 도피일 뿐 아무것도 개선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환상 밖의 현실에서 히틀러는 다시 웃고 있을 것이다.

p.s. 여성에 대한 시선도 매우 우려되는 만큼 이것은 현재의 내셔널리즘과 엮어서 따로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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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7 19:00

내셔널리즘의 덫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에 이어 정권마다 반복되던 독도 문제가 곧바로 불거져 나왔다. "2MB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독도 괴담'을 방불케 하는 <요미우리>의 자극적인 보도 내용과 사안 자체의 심각성은 독도 문제를 금세 여론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또, 대북문제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정부는 이번만큼은 '건수'를 잡은 듯 마음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독도 괴담'의 주인공인 만큼 그 혐의를 벗기 위해 열심인 모습이 꽤나 가상하다. 하지만 역시 '2MB'는 역시 '2MB'다.
 
  청와대는 <요미우리>와 일본 정부에 한국의 내분을 획책한다며 비난했다. 동시에 독도 문제로 맹공을 퍼붓는 야당에 대해서도 '자국 정부보다 일본의 우파 신문을 믿고 대통령을 공격한다'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자국민보다 극우 언론을 믿는 정부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2MB를 제외하곤 누구도 완벽하지는 않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같은 날 나온 다른 보도를 보자. 2MB 대통령은 지난 15일 부산시 업무보고 및 부산 발전전략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환은 어쩔 수 없지만 내우(內憂)는 하나가 돼 극복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시된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초점을 잠시 '공화국 북반부'로 돌려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 정부와 언론의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대해 "지도부와 인민을 분열시키려는 음해공작이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북한의 식량위기는 미제의 고립 압살 책동 때문이니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전 인민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에 핵 문제를 제기하는 남한의 '동족'에 대해서는 모두 '미제의 앞잡이'로 매도하고 있다.
 
  극적인 비교를 위해 다소 과장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 구도가 상당히 유사하다. 외부의 적과 어려운 환경을 설정하고 그것을 빌미로 내부의 총화단결을 호소(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는다)하는 수법은 나치 이래로 전체주의 세력들의 고전적 수법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아군'의 악덕을 비판하는 내부 구성원들은 '적군'을 이롭게 하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숙청 대상이 된다. 일본 재단의 자금을 지원받는 낙성대 연구소-노파심에서 말하자면 필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친일적'이기 때문에 매도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보다 일본 언론을 인용해 대통령을 공격하는 민주당이 '국가의 반역자'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사실 이 수법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사한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취임 초기부터 반대세력에게 '반미 민족주의 진보'로 낙인찍힌 노무현 대통령은 강경한 대일발언과 자주국방이라는 명분을 통해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했다. 그는 반대세력이 자신에게 붙인 딱지를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그는 참여정부 때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사회 각 계급을 재편했고, 이에 따른 불만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억압되었다. '국익'이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정치적 논란을 종결짓고, 잘못을 전가하는 보도가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친일세력'으로 규정되어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평소 민족의 해체를 주장해 대표적 '친일세력'으로 인식되는 '뉴라이트' 세력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2MB 정권의 총화단결 호소는 참여정부가 자극한 민족주의 정서와 맥락도 다르고, 효과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극한 민족주의 역시 '선진 국가'를 위한 국가주의적 프로그램의 외피에 불과하다는 면에서 2MB의 노골적 국가주의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정치에서 포장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2MB의 딜레마는 자신은 끝없이 국가주의를 강조하지만, 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종족담론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민족주의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MB 정권은 국가주의를 향한 질주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기세다. 정부는 독도 문제에 대해 신중한 대응을 주문-금강산 문제에 대한 쌍팔년도 식 발언을 보자면 특별히 성숙한 정세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념적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일본의 언론을 보라", "여야도 없고, 진보-보수도 없고 모두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우리는 본질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안에다 총질을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와 같이 노골적으로 총화단결을 호소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신중한 대응을 외치면서도 마치 외부의 적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일 것인 양 대내적 단결을 호소하는 것은 다소 형용 모순 같다. 과연 무엇을 위한 총화단결일까?
 
  이러한 모순된 국가주의 드라이브가 계속된다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두 얼굴이 서로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MB 정권은 '우리 민족끼리' 에 대한 반명제로서의 친일, 친미적 보수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종족담론을 끌어들일 수 없다. 또 2MB 정권은 참여정부의 '황우석 현상' 같은 국가지도자와 민족의 구세주가 일치하는 통일된 내셔널리즘도 확보할 수 없다. 그렇지만 2MB의 대외정책 실패와 일본의 우경화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내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그 세력을 결집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력들은 2MB의 우군보다는 대항세력이 될 공산이 크다.
 
  촛불이 시작된 이래 '민주-반민주' 의 구도로 나타났던 대립구도가 10년을 더 후퇴해 '매국노-민족'의 구도로 전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구도는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주도했던 2MB 자신이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당부분 위험한 조짐이 보인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독도 관광 붐이 일어나고, 독도 관련 영화가 개봉되고, 독도 관련 법안들이 무더기로 발의되는 '독도 마케팅'은 매우 우려스럽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촛불시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막연하게 표출된 내셔널리즘은 독도라는 구체적 대상을 만나 본격적으로 발현될 것이다.
 
  문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구도는 양자가 서로를 '반국가 세력', '매국노'로 규정하는 극한의 대립 속에서 양자를 포괄하는 내셔널리즘 자체의 상승작용을 유도하며, 이렇게 강화된 내셔널리즘으로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대립의 발단이 된 내우외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아니,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데올로기에 갇힌 대외정책의 막장은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이,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호소된 총화단결의 끝은 계급지배의 강화로 귀결된, 레이거노믹스의 파탄이 이미 증명해주고 있다.
 
  아마 앞으로 2MB 정부가 무엇을 하든 그 태생적 한계와 특유의 촌스러움으로 인해 단결된 국민의 동원에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가 아닌, 앞에서 말했다시피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억압하는 지배블록에 대한 도전연합의 저항이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전선이 내셔널리즘 내에서 형성되는 경우이다. 이 상황이야말로 정부가 주권의 두 요소인 대외적 자율성-사실 2MB 정권 하에서는 이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과 대내적 수행력 모두를 상실하는 순간이며 대항세력마저 내용물이 다를 뿐 형태는 같기에 그 미래마저 기약할 수 없는 캄캄한 상황일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요구되는 자세는 각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외교문제를 빌미로 주제넘게 시민사회에 대해 윽박지르는 것을 중단하고 본연의 임무인 외교에 충실하게 임하고, 시민들 역시 독도관광 따위의 쇼에 열광하기보다는 정부의 외교정책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 2MB 외교정책의 문제점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적되어 왔지만 그것을 방치한 건 우리들 자신이다. 사실 우리가 일장기를 태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본 정부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는 자위에 불과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독도 관광 한번으로 숭고를 체험하기에는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프레시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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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3 00:43

국가주의, 민족주의

 오늘날 한국 현실에서 국가주의만큼 공리(公理)의 영역에 존재하며 시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이념은 없다. 서로 대립하는 정당들과 단체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각자의 주장이 ‘국익’ 을 가장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해 왔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이 지지했던 세력이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가 생기거나 애초에 자신들이 반대하였던 세력을 공격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이들에게 심판을 내린다. 최근의 촛불시위 역시 동일한 행위를 놓고 국익을 위한 행위로 해석하는 정부와 그것을 매국행위로 해석하고 규탄하는 시민들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경향은 단순히 맨얼굴을 드러낸 군사정권의 국가주의에 또 다른 민족주의와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맞서 싸워온 기성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가?’ 라는 문항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한 응답자의 비율은 68.5%, ‘나라의 발전과 자신의 발전을 동일시 하는가?’ 라는 문항에 대한 긍정적 답변은 51.1% 로 나타났으며 ‘대한민국이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문항에 대한 긍정적 답변의 비율은 52.6% 로 나타났다. 이 조사의 결과는 한국에서의 국가주의 및 그에 병행하는 민족주의의 성행이 단순한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이 아님을 보여준다.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국가주의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가주의는 국가에 비해 개인의 우위를 주장하는 자유주의(liberalism)에 대립되는 입장이다. 국가는 개인들간의 계약에 의하여 성립되었다는 사회 계약설과 개개인의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규정한 천부인권설에 기반을 두어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에 반해 국가주의는 국가는 사회 계약과는 무관한 초월적 실재이며 사회 구성원 각자는 국가 내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역할이 배분되어 있다는 사회유기체론 및 국가 유기체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국론의 분열을 터부시하며 국민의 단결과 통합을 강조하는 한국의 지배담론은 분명 국가주의적이다.

 흔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Nationalism 이라는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는 쌍둥이와 같은 존재이다. 이에 대해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 할 수는 없으며 특히 한국의 특수한 분단 상황 에서는 냉전반공 사상을 표방하며 국가주의적 성향을 지녀왔던 한국의 집권세력과 정권들이 민족주의 이념의 측면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러한 분석은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여 한일 협정 졸속추진 반대 시위를 거쳐 이어 내려오는 민중운동의 계보를 고려한다면 분명 타당성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국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군사정권이 민족주의적 색채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운동세력이 국가주의적 색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국가주의를 표방한 군사정권은 민족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였으며 ‘우리 민족끼리’ 를 내세운 운동세력 역시 북한의 국가주의에 침묵하였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의 상당수가 군사적 통치방식 자체에 대한 반발보다는 통일문제나 대일(對日)문제와 같은 사안을 위주로 전개되었으며 이에 비해 1964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파병에 대한 반대활동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유사성을 반증해준다.

 따라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보다는 양자의 차이점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양자의 공통점인 전체주의적 속성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한국에서의 국가주의 문제에 접근하기에 좀 더 알맞은 시각이라고 본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구분은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좀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구분에 관한 코마로프와 코마로프(Comaroff & Comaroff)의 논의를 빌리자면 양자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기 보다는 하나의 연속선상에 정도의 차이로 존재한다. 물론 양자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서로 변환이 가능하며 이 변환은 기호에 작용하는 권력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정리하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체계를 가진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간의 경쟁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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