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척 깔끔떨고 뒷짐지고 있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릴 일도 없을 것이며 고뇌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기만 속에서 완결된 자신의 세계가 깨지지 않는 것은 아마 정말 속편할 것이다.
하지만 루쉰은 말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한줌의 빛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언젠가는 빛을 찾아 밖으로 나갈 수가 있기에.
'촛불문화제' 까지는 정말 고민없이 나올 수 있었다. 전경이 연행을 하지도 않았고 소라광장에 모여 콘서트와 자유발언을 보며 가볍게 2MB를 씹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촛불시위' 가 된 이후로, 그리고 8일 쇠파이프가 등장한 이후로 빠져나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빠져나가겠다는 '나약함'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자들만이 투쟁할 수 있는 세상의 구조 자체가 문제일 게다.
그렇지만 자신의 '나약함' 을 수용하거나 인정하지 못한채 거기에 온갖 '멋진' 미사여구-이성, 합리성, 평화-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그리 좋은 눈으로 바라보기가 힘들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히 생각해보자. 나를 진정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모두가 근본적 비폭력을 주장하는 탈근대 전사들인가? 그런 사람들이 이라크 파병할때는 뭘 하고 있었나.
폭력사태가 여론에 미치는 영향을 걱정하는 것과 폭력을 긍정하지 않더라도 시위에 계속 참여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시위의 '순수성' 운운하며 빠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짜증이 난다.
애초에 민의의 본질이란 것이 있던가? 시민과 운동권의 낡은 이분법에 갇힌 채 자신들의 안전한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자위에는 근거없는 감정적 혐오 이상의 이유가 없다. 생각해보자. '전문 운동권' 들이 작정하고 폭력투쟁 하려고 마음먹고 나왔으면 7일 새벽에 이미 모든 전경버스가 박살났을게다.
자신들이 이미 통합의 제의에 혹해서 참여하였다면, 돌출적으로 나오는 폭력마저도 어떤 방식으로든-말리든 부추기든- 포용할 필요가 있다. 미안하지만 평생 그런식으로 헤게모니에 영합하며 자신의 세계를 부수지 않은채 도피를 하다간 '이성' 의 정점에 오를 수가 없다.
폭력투쟁을 긍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그것대로 고민하고 시위의 대의는 그것대로 고민하고 좀 전략적으로 사고하라는 말이다. '냉철한 이성' 좋아하는 분들이 가장 감정이고 당위적으로 판단을 하고 있다.
'망상의 변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MB 요정설에 대한 신뢰도 대폭 증가 (2) | 2008/06/17 |
|---|---|
| 결전의 날 (0) | 2008/06/10 |
| '폭력시위' 에 대한 일련의 반응에 대한 단상 (6) | 2008/06/08 |
| 노파심 (0) | 2008/06/06 |
| 체 게바라의 굴욕 (0) | 2008/05/18 |

Prev
Rss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