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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8/17 본격 한반도 대운하 신문
- 2008/08/17 뒤늦은 건국절 단상
- 2008/08/06 공정택, 그리고 강남의 도덕과 욕망
- 2008/08/05 세계의 굴뚝, 베이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
당시 7살의 어린 나이였던,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가슴 속에 프랑스의 패배는 깊숙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패배가 국민의 마음 속에 있는 나약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쿠베르탱 남작은 훗날 체육교육의 보급에 힘을 쏟게 된다. 근대 올림픽은 체력은 곧 국력이자 자기계발의 수단이라는 쿠베르탱 남작의 신념이 지덕체(智德體)의 합일을 이상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라는 소재를 접하고 가장 총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요컨대 근대 올림픽은 제국주의 시대의 국민동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쿠베르탱 남작에게 영감을 준 19세기 영국의 체육교육은 식민지 개척에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엘리트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성장소설은 복싱 등의 스포츠를 통한 자기계발과 남성으로서의 각성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곧 자신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폴리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군인이었다.
결국 근대 올림픽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의 강조는 전 국민을 언제든지 동원 가능한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지 흔히 생각하는 국민체육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19세기와 오늘날의 차이는 여성도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군국주의적이라고 하여 현대 올림픽 역시 국민을 군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자본과 세계화라는 변수가 끼어들어 근대 올림픽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월드컵과 대비되는 올림픽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팀이 존재하는 인기 스포츠의 비중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여기서 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의 행복한 공존이 나타난다. 축구와 같은 인기 스포츠에서는 국제 경기가 열릴 때 프로팀 및 선수 개인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된다. 예컨대 호나우도와 같은 스타선수에게 자신이 소속된 프로팀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과 국가 대표팀의 훈련에 열심히 참여하여 모국이 국제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택일해야 하는, 상호 배치되는 일이다. 선수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면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은 자본과 국가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는 소속팀이 곧 국가이기에 팀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다. 국가는 이들을 국가를 위한 대리전을 치르는 전사로 훈련시키고-아마 프로팀에서 한국 양궁 대표팀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다면 법정 소송까지 걸릴 것이다-자본은 이들의 스폰서를 자처하며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활용한다. 호나우도의 슛은 대부분의 경우 국가보다는 자본을 위한 것이지만, 김연아의 연기는 국가와 자본을 모두 만족시킨다.
선수를 둘러싼 국가와 자본의 공모는 올림픽 행사 자체로도 이어진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적 제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총력전이기 때문에 그만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스포츠 과학' 이라는 이름의 첨단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가동하는 데에는 스포츠 용구 제작회사들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함에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게다가 공식후원업체 인증이라는 '독점권' 의 보장과 '올림픽 특수' 는 자본의 이윤을 위한 국가의 노골적인 러브콜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더 이상 지덕체가 합일된 이상적 인간(군인)의 육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인류 보완계획보다는 차라리 로마인에게 제공되었던 '빵과 서커스' 에 가깝다. 그리고 '빵과 서커스' 의 생산은 대부분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국가는 이들에게 독점적 이윤을 보장한다. 오늘날의 올림픽 행사 자체에서는 쿠베르탱 남작이 내걸었던, 다소 구시대적인 이념미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기치를 내건 올림픽 개막식을 무색하게 하듯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거장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스펙터클한 개막식은 올림포스의 신들 대신 국가와 자본이라는 근대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올림픽을 즐긴다.
물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올림픽은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으며 그것들은 자본과 국가의 얼룩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빛난다. 어떻게 포장이 되었든간에 선수 개개인은 자신과의 싸움에 임하는 것이며, 그러한 선수들의 노력과 성과를 진지하게 지켜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품위 있는 일이다. 박태환의 선전과 펠프스의 장애 극복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가 올림픽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선수 개개인들이지 올림픽 그 자체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결이라는 내셔널리즘의 틀이 없더라도 펠프스와 박태환은 개개인도 그렇고 그 둘의 대결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다행히도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올림픽 기간에 자행된 2MB의 폭거는 하나하나가 평소였다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일들이다- 정부와는 별개로 한국 시민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태도는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외국 선수들의 선전에 대한 솔직한 감탄과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야 올림픽을 국가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닌, 순수한 스포츠로서 즐기는 데에 가까이 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인해 개혁에 실패한 뒤 빵과 서커스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던 로마 공화정의 몰락은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희생당하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하여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중국이 주최하고 초국적 자본들이 공모하여 전 세계에 제공한 올림픽이라는 빵과 서커스의 뒤에는 어떠한 아픔과 증오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라는 이름의, 올림픽이 강조하는 국민공동체 내부의 아픔과 상처 역시 마찬가지이다. 2MB 가 태극기를 거꾸로 흔들며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을 때,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 끝에 병원으로 싷려갔다. 기륭을 모르고 올림픽에 열광하는 한, 우리 모두는 2MB와 공범이다.
프레시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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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홈페이지는 여기-
http://www.kgwoonha.com/
특정 토목 사업을-추진여부도 확정되지 않은- 제호로 내걸고 그것만을 보도내용으로 삼는 신문이 유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아우토반 차이퉁', '후버 데일리 트리뷴' 이라고 하니 조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한다.
신문의 창간기사를 보니 한반도대운하 방송국도 운영한다고 한다. 물론 신문과 방송 둘 다 온라인 상에서만 활동할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신문과 방송을 굳이 찾아서 보는 사람이 있을지 매우 의문스럽다. 차라리 변희재의 빅뉴스를 보겠다.
여하튼 이런 괴상한 신문을 도대체 누가 창간하였나 궁금해서 스크롤을 쭉 내려보았다. 웹페이지에 명시된 바로는 '한반도대운하재단' 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와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이 주축인 모양이다.
그런데 '한반도대운하재단' 으로 검색을 해보니 버젓한 홈페이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 빈곤한 각종 시민단체들도 홈페이지 혹은 카페를 운영하는 마당에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지 않는지 궁금해하던 차에 취업사이트에 한반도대운하재단 이라는 검색어가 걸려들었다.
자그마치 공기업이다. 궁금해서 검색을 더 해보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정보를 보았다. 지난 4월 4일 한반도대운하 재단은 국토해양부 산하로 편제되었고 그 동안 한반도대운하 국민운동이라는 관제운동을 펼쳐오던 김주성이라는 사람(위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대운하 신문의 발행인이다)이 이 재단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http://www.lifebokji.com/news/article.html?no=376)
2MB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며 민영화에 신들린듯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게다가 최근에는 우량 흑자기업인 인천공항마저 민영화를 한다고 하여 민영화의 기준에 대한 의문마저 일게 하였는데, 이제 의문이 풀리는 것 같다.
국고는 한정되어 있기에(게다가 대책없는 감세로 인한 세수감소는 치명적이다)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선별적으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2MB는 경제논리 대신 진영논리로 공기업 및 정부를 운영하려는 모양이다. 인천공항 대신 한반도대운하 재단이라니, 항공기에서 바지선으로의 퇴보이다.
한국에서 토목공사와 관련된 이익집단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무섭다. 이들에게 전체 사회의 복리는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2MB는 한반도대운하라는 거창한 '떡밥' 을 던짐으로서 떡밥을 둘러싼 파장만으로도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생겨나는 기적을 연출하였다. 대운하 관통 예정지에 대한 부동산업의 성황과 그에 이어 대운하 사업 홍보팀까지 모든 것은 돈으로 움직인다.
관제운동이나 벌이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권력에 눈이 먼 자들에게 떡고물을 쥐어주고 괴벨스의 입으로 활용하는 것이 2MB가 말하는 작은 정부라면, 이 정부는 굳이 2MB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작은 정부가 될 것 같다. 도대체 이런 정부를 누가 신뢰하겠는가? 시민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저절로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이 신문과 재단은 만약 한반도대운하가 공식적으로 취소되거나 완공된다면 무슨 일을 할까? 아마 전자의 경우에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일으키며 계속 대운하 건설을 주장하며 연명을 할 것 같다(종말예언이 어긋난 교주의 운명이랄까). 그런데 대운하 완공후의 행보는 쉽게 예측이 되지 않는다. 아마 대운하에 띄운 12층 규모의 유람선에서 2MB를 모시고 풍악을 울리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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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이 아닌, 1948년 8월 15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광복절’ 이 아닌 ‘건국절’ 이라는 명칭에 익숙한 사람은 아예 극소수에 불과하다. 의도적으로 건국이라는 표현을 각인시키려 애쓰는 것 자체가 집단의 기억 속에서 광복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가 강고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하지만 뉴라이트 학계를 등에 업은 2MB 정부는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기 위하여 건국 60주년을 강조한 8.15 기념행사를 강행하였다. 그 동안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대표되는 뉴라이트 학계의 주장과 최근 건국절과 관련된 이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이들이 멀쩡한 광복절을 놓아두고 건국절 이라는 생소한 명칭에 집착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일단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고도의 지적 훈련을 거친 학자 집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해석투쟁과 집단기억의 선별 작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지난 10년의 민주화 정부를 명분만 내세운 무능한 세력으로 낙인찍은 ‘잃어버린 10년’ 이라는 레토릭은 이들의 최고 성공작이다. 그렇지만 안티테제만으로는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헤게모니 구축이 힘든 법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국민들의 세계관 자체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맞도록 개조할 필요가 있었고, ‘경제 대통령’ 이라는 구호로 현재를 개조한 이들이 눈을 돌릴 곳은 세계관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영역이다. 그리고 ‘경제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천박한 경제동물 및 신실한 국가주의자의 이중적 면모-위대한 박정희는 시장주의자였을까-를 과시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경제성장을 통한 강대국의 건설’ 이다.
2MB의 출신지역에 대한 논란이 보여주듯 내셔널리즘이 유독 강한 한국에서 일본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는 반동 세력들에게 있어 하나의 원죄에 가까웠다. 기존의 올드 라이트가 이 논란을 회피하는 데에 급급하였던 반면, 경제를 내세우며 헤게모니를 어느 정도 장악한 뉴라이트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이 논란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다. 즉, 친일 경력을 부인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도 정당한 행위였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다.
물론 건국절 이라는 명칭 자체에 친일적 요소가 반영된 것은 아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대로 1948년 8월 15일 법적으로 건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엄연히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광복절을 대체하는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뒤에 깔려 있는 의도가 정치적으로 불순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앞에서 지적하였다시피 뉴라이트 세력의 지상목표는 경제발전을 통한 강대국의 건설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실력양성론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이들의 대다수가 본격적인 동원이 이루어졌던 30년대 들어 변절하였다는 점은 더욱 시사적이다. 안병직 교수를 위시한 뉴라이트 세력의 상당수는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미제와 결전을 벌일 수 있는 자주적인 통일강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던 NL(National Liberty : 민족자주) 및 주사파 출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은 결과론적으로 남한이 더욱 강대국이 되자 미련 없이 김일성을 버리고 박정희로 방법론을 갈아탔을 뿐이다.
이들이 건국절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한국일보에서 실시한 이영훈 교수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승만은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였기에 건국을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결과론적 사고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승만이 건설한 국가가 현재 위대한 것과 이승만이 건설한 국가가 위대한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게다가 현재의 정부가 아무리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이승만 정부와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요컨대 건국절 이라는 명칭의 뒤에는 강한 국가에 대한 도착증적인 욕망 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뉴라이트 세력의 이론 속에서 친일 경력은 부국강병 및 실력양성을 위한 선각자의 솔선수범이 되며 분단국가 수립은 ‘위대한 경제발전이 운명 지워진’ 국가를 건설한 선견지명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민중의 희생과 사상의 실종에 대한 비판이 자리 잡을 곳은 없다.
그렇기에 건국절에 대한 비판은 이들의 천박함과 성찰 없음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지 ‘친일파’ 라는 비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 뉴라이트는 스탈린 시절에 살았다면 아내와 자식이 수용소에 끌려갔음에도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멈추지 않던 몰로토프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좌파와 우파, 그리고 사람들의 희생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경제수치로 대변되는 전체의 성장만이 중요할 뿐이다.
8월 15일 제 60주년 건국절에서 2MB 가 행한 연설은 2MB를 위시한 뉴라이트 세력의 사상의 정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단결과 통합, 그리고 경제발전. 구질구질한 63년 전의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60년 전 이승만 각하가 들여온 가치들을 계승하자는 말 같은데, 63년 전의 물건이나 60년 전의 물건이나 낡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제 친일/항일의 이분법적 구도와 천박하게 이해된 자유주의 및 국가주의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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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시민직선에 의해 치루어진 이번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근 3달간 들어왔던 촛불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전통적인 이익집단 세력을 동원 가능한 공정택에 대항하여 이 정도로 '조직표' 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을 순전히 촛불의 힘이다. 하지만 이념지형 상에서의 극단적인 대비와 낮은 투표율이 말해주다시피 이번 선거는 이미 입장이 정해져 있던 사람들 중 자신의 편을 얼마나 많이 투표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던, 실질적으로 동원력의 싸움이였고 이 싸움에서 어쨌던간에 패배한 것 역시 현실이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구별 득표자료를 다시 확인해보자.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서초, 강남, 송파로 대표되는 강남 8학군 라인의 공정택에 대한 몰표가 유독 눈에 띈다. 진보신당 송경원 연구원이 지적했다시피 이러한 몰표현상이 공정택의 교육정책에 대한 진지한 유물론적 고찰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공정택은 '강북 아이들이 강남으로 유입되지 못하게 하겠다' 는 공치사를 날리긴 하였지만 강북 학생이 강남으로 진학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는 이상(그리고 고교선택제는 정 반대의 제도이다) 이는 '부동산 규제는 하겠지만 집값은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라는 공치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공정택을 '믿었다'
하지만 이것을 계급투표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송경원 연구원의 지적과는 달리, 이러한 믿음은 관념적 계급의식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 투표는 철저히 계급투표이다. 즉, 자신의 유물론적 이익 보다는 '강남이 선호하는 이념의 교육제도' 라는 가치에 투표를 한 셈이다. 물론 기존의 8학군이 특목고와 자사고로 대체되고 8학군은 강남의 중하위권 학생들 혹은 강남의 상위권 학생들로 채워지고, 특목고와 자사고에서 8학군보다 양질의 교육을 제공한다면 강남의 학부모들 입장에서는 이익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는 상대평가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강남의 학부모는 입시 문제에 대해서는 집값에 대해서 만큼이나 극성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그 기저에 깔린 심리는 자녀를 통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함과 동시에 노후에 대한 투자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순수한 '모성애' 라면 그렇게 그악스럽고 이기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남 학부모들은 '경쟁' 이라는 명제를 택하였을까. 8학군에서 미적분을 배워서 명문대에 가는 것과 과학고에서 선형대수를 배워서 명문대에 가는 것은, 최소한 강남 학부모들에게 있어서 결과치는 같다. 그들이 원하는건 '세계적 인재', '학문적으로 탁월한' 자식이 아닌, '명문대를 나와' '상위계층에 있는'(계층의 구분은 항상 상대적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자식이니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학비도 더욱 비싸고 멀기까지 할-아무리 2MB라도 자사고를 강남에 몰아서 짓지는 않을 것이다-특목고와 자사고라는 대안은 하등 도움될 것이 없다. 8학군과 강북 학교들의 관계, 그리고 자사고 및 특목고와 일반계 고등학교의 관계는 권력의 구조 면에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자사고에서 교육을 받으나 8학군에서 교육을 받으나 그들은 상대적으로 최상위층에 있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교육의 힘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들이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은 별 다를게 없다. 기숙사 제도로 운영되는 자사고라면 사교육을 통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 확률이 떨어질 수까지 있다.
이것은 모종의 도덕주의적 기만을 말해준다. 노동조합의 조합주의적 행태를 욕하면서도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을 '국가의 경제 발전' 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자기세뇌를 한 채 2MB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의 심리와 비슷하리라. 자신의 자녀가 상대적인 계급구조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만 자신도 자각 못하는 사이에 그것이 국가주의적인 성공 담론과 혼재되어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욕망하는 이드와 가치를 추구하는 초자아쯤 될 것이다. 강남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도 공정택이 30% 이상의 특표율을 올린 것은 비단 강남뿐만이 아닌, 전 국민적으로 작동하는 이러한 기만의 실체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단지 '여유있는' 강남이 그들의 가치를 좀 더 숙고하였고 그것에 더 강하게 동기를 부여받고 투표소로 달려갔을 뿐이다. 이미 '강북' 혹은 '서민' 과 투쟁하는 대자적 계급으로 자신을 정립한 강남의 주민들은 즉자적 계급의식도 형성하지 못한채 강남의 욕망을 욕망하는 강북의 주민들과 그 적극성 측면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강남의 주민들은 그것이 비록 소외당한 욕망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욕망을 만들 줄 알고 있다.
촛불은 사람들의 정의감은 자극하였지만 욕망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였다. '생활정치' 라는 호들갑은 역설적으로 상존하는 욕망에 의한 정치의 힘을 반증해주는 것이리라. 결국 의식의 차원에 있는 정의감에서 투표소로 달려간 사람들은 욕망에 의해 추동된-겉으로는 '경쟁 교육이 국가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초자아의 외피를 둘러쓴- 사람들보다 그 수가 적었다. 아마 에리히 프롬의 말이였을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사람들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바꾸지 않고 모두를 중산층으로 만드려 했기 때문이라고.
예상보다 선전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패배한 것은 패배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정의는 그들의 욕망보다 치열하지 못했던 것이였고, 우리는 욕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놓고 욕망할 수 있는 정의의 언어-경쟁력, 국익으로 대표되는-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강북의 학부모들 마저 강남의 언어에 포섭되어 공정택을 욕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욕망을 둘러싼 담론은 2MB 가 당선된 지난 대선때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시작된 촛불정국에서 욕망이라는 소재는 '민중의 생활에서 나온 요구' 이라는 초월적 당위성으로 포장된 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었다.
이번 교육감 선거의 결과에 실망을 하거나 분노를 한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남아있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욕망이다. 그렇지만 욕망을 '이용' 할 것인지 '개조' 시킬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보는 각자에게 맡기겠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자유연애를 금지하고 무한경쟁의 틀에 학생들을 몰아넣는 공정택 체제에서 자란 학생들은 무엇을 욕망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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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치는 민족주의 (2) | 2008/07/21 |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국제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상징적인 계기들로 작용할 것 같다. 이미 '세계의 굴뚝' 으로서 세계경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확립한 중국은 이번 올림픽을 통해 단순한 경제 강국을 넘어선,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그 조짐은 이미 다방면에서 나타다고 있다.
물론 중국의 이러한 시도는 미국의 헤게모니에 비하면 초라한, 절반의 성공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홉스봄의 신간 <폭력의 시대> 에서 지적하다시피, 미국의 헤게모니는 그것이 소비에트에 비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 다른 강대국들의 양해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구미의 선진국들은 이미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중국에 대해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세계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쪽의 악덕을 더 참을 수 있을까.
하지만 유럽연합은 푸틴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서 중국을 한시적으로 어느정도의 패권국가로 인정해줄 것이다. 그리고 중국 패권의 한계는 거기까지이다. 세력균형을 맞추기 위한 물질적 추 이상을 넘어선, 아편전쟁 이전의 정신적 종주국까지 자처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언감생심이다. 이미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담론이 '역사의 종말' 까지 선언한 현재 세계에서 중화주의가 전 세계인들의 가치기준이 될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이번주 시사 IN 에서 서술하고 있는 중국의 올림픽 준비 내용을 보고 있자면 중국 역시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들은 미국에 맞서 중화블록을 건설하는 헤게모니 투쟁보다는 자신들의 중화를 정복하였던 서구적 근대의 '힘' 만을 추구하기로 한 것 같다. 인권문제를 이유로 스필버그가 사퇴한 후 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담당한 장예모가 '황후화' 에서 보여주었던 것은 중화의 인문이 아닌, 서구의 시선으로 본 봉건적 동양 판타지의 스펙터클 뿐이었다. 이것은 상징적이다.
장예모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및 현대 중국 문학에서 나타나는, 서구화된 근대 상하이라는 대체적 공간에 대한 노스탤지어-최소한 엄격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서구적인 것을 현재 속에서 드러내놓고 욕망할 수 없었으니-는 이제 국가가 주도하는 한편의 거대한 연극 속에서 그 가면을 벗는다. 서구화는 둘째 치더라도, 스터디움 건축을 위해 아무런 보상 없이 주민들을 철거시키는 그 무지막지함 속에 노골적인 힘에 대한 갈망이라는 중국 패권의 본질이 잘 나타나 있다.
평소 함축된 고사성어로 외교 정책을 암시하던 중화적 인문의 세련된과 섬세함은 아편전쟁의 설욕을 향한 세력 과시의 일념에 압살되고 말았다. 유럽의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거대한 스케일의 건축물과 서구의 예술가들이 만든 대형 전시물 속에서는 '세계의 굴뚝' 만이 보일뿐 동아시아의 문화 공장을 담당했던 깊은 '중화' 는 찾아볼 수 가 없다. 이러한 스펙터클은 세계인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포섭할 수는 없다. 강대국이 되는 것과 선진국이 되는 것 사이에는 황하의 폭 만큼이나 넓은 간격이 존재한다.
문제는 국가의 잘못된 방향설정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중국의 지식인과 엘리트들 역시 강대국을 향한 정부의 국가주의 프로젝트에 복무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목록은 <쿵푸팬더> 의 눈색깔을 트집잡아 드림웍스에게 소송을 건 '예술가' 부터 중화제국을 찬양하는 '지식인' 까지 참 다양하다. 아마도 이들의 버라이어티 쇼는 아편전쟁 이후 서구에 굴복한 중화제국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원하는 것은 '강한' 중국이지 '깊은' 중화 문화는 아니다. 후자는 전자를 상상하고 과시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중국이 알리앙스 프랑세즈와 괴테 문화원에 맞서 공자를 내세우는 것은 유교에 대한 경의와 자부심보다는, '세계적인 것' 에 대한 집착이라는 면이 더 클 것이다. 공자는 우연히 그 기준에 부합했을 뿐이다. 성화봉송 당시 티벳 독립 반대를 외치며 발광하던 중국 유학생들의 모습은 유교적 예(禮)와는 거리가 먼, 벌거벗은 중국 패권의 본 모습이다.
동북공정과 백두산 잠식을 일삼는 중국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동북아시아에 일본과 러시아라는 또 다른 강대국들이 있고 미국이라는 균형추가 존재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만행들이 동아시아에서도 자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누가 아는가? 중국과 미국이 21세기 버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혹시라도 모른다면 꼭 찾아보기 바란다. 이것이 제국의 실체다)이라도 맺을 수 있을지.
중국은 위험하다. 미국과 같은 가식조차 존재하지 않는 노골적인 권력 그 자체이다(물론 이것이 네오콘의 중국 위협론과 궤를 같이 하여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중국과 외교적으로 많은 관련이 있는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야욕에 대한 대응을 분명히 마련하여야 한다. 한국 역시 북한을 내부식민지로 보는 제국주의적 관점을 버려야 함은 당연지사이지만(금강산 관광을 '시혜' 로 보는 2MB 의 오만함을 상기하자).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세계패권을 향한 상징으로 이용하려는 중국과 국내의 여론을 돌리기 위한 용도로 이용하려는 2MB의, 서로 의식하지 못하는 밀월 아닌 밀월은 우려스럽다. 인문을 던져버린 벌거벗은 국가주의자들의 무의식적 상동성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올림픽이 끝나는 날부터, 우석훈이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우려하였던, 문화가 거세된 노골적인 힘들의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을 제어할 수는 없지만 한국을 인문국가로 만들 수는 있으니, 패권적 야욕에 대한 지혜롭고 세련된 대응을 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무더운 여름에 피서삼아 베이징 올림픽을 즐기는 것은 좋다. 올림픽을 본다는 것 자체가 국가주의적 술책에 놀아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2MB가 원하는 불도저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신문과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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