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현실에서 국가주의만큼 공리(公理)의 영역에 존재하며 시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이념은 없다. 서로 대립하는 정당들과 단체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각자의 주장이 ‘국익’ 을 가장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해 왔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이 지지했던 세력이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가 생기거나 애초에 자신들이 반대하였던 세력을 공격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이들에게 심판을 내린다. 최근의 촛불시위 역시 동일한 행위를 놓고 국익을 위한 행위로 해석하는 정부와 그것을 매국행위로 해석하고 규탄하는 시민들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경향은 단순히 맨얼굴을 드러낸 군사정권의 국가주의에 또 다른 민족주의와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맞서 싸워온 기성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가?’ 라는 문항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한 응답자의 비율은 68.5%, ‘나라의 발전과 자신의 발전을 동일시 하는가?’ 라는 문항에 대한 긍정적 답변은 51.1% 로 나타났으며 ‘대한민국이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문항에 대한 긍정적 답변의 비율은 52.6% 로 나타났다. 이 조사의 결과는 한국에서의 국가주의 및 그에 병행하는 민족주의의 성행이 단순한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이 아님을 보여준다.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국가주의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가주의는 국가에 비해 개인의 우위를 주장하는 자유주의(liberalism)에 대립되는 입장이다. 국가는 개인들간의 계약에 의하여 성립되었다는 사회 계약설과 개개인의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규정한 천부인권설에 기반을 두어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에 반해 국가주의는 국가는 사회 계약과는 무관한 초월적 실재이며 사회 구성원 각자는 국가 내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역할이 배분되어 있다는 사회유기체론 및 국가 유기체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국론의 분열을 터부시하며 국민의 단결과 통합을 강조하는 한국의 지배담론은 분명 국가주의적이다.
흔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Nationalism 이라는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는 쌍둥이와 같은 존재이다. 이에 대해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 할 수는 없으며 특히 한국의 특수한 분단 상황 에서는 냉전반공 사상을 표방하며 국가주의적 성향을 지녀왔던 한국의 집권세력과 정권들이 민족주의 이념의 측면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러한 분석은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여 한일 협정 졸속추진 반대 시위를 거쳐 이어 내려오는 민중운동의 계보를 고려한다면 분명 타당성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국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군사정권이 민족주의적 색채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운동세력이 국가주의적 색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국가주의를 표방한 군사정권은 민족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였으며 ‘우리 민족끼리’ 를 내세운 운동세력 역시 북한의 국가주의에 침묵하였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의 상당수가 군사적 통치방식 자체에 대한 반발보다는 통일문제나 대일(對日)문제와 같은 사안을 위주로 전개되었으며 이에 비해 1964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파병에 대한 반대활동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유사성을 반증해준다.
따라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보다는 양자의 차이점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양자의 공통점인 전체주의적 속성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한국에서의 국가주의 문제에 접근하기에 좀 더 알맞은 시각이라고 본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구분은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좀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구분에 관한 코마로프와 코마로프(Comaroff & Comaroff)의 논의를 빌리자면 양자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기 보다는 하나의 연속선상에 정도의 차이로 존재한다. 물론 양자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서로 변환이 가능하며 이 변환은 기호에 작용하는 권력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정리하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체계를 가진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간의 경쟁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에 다름 아니다.
'달리는 생각들 >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내셔널리즘의 덫 (4) | 2008/07/17 |
|---|---|
| 촛불을 드는 것, 혹은 관찰하기 (2) | 2008/07/08 |
| 국가주의, 민족주의 (1) | 2008/06/23 |
| 2MB의 화려한 주말...2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4) | 2008/06/03 |
| 초라한 대학생? (0) | 2008/05/12 |

Prev
Rss Feed